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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Oct 28. 2020

글을 쓰는 이유

말이 참 어렵습니다. 눌변은 아니라 더 그렇습니다. "모르겠어요, 생각해보고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하면 될걸. 바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도 이것저것 살을 붙여 적당한 대답을 지어내 버리는데 그게 영 맘에 들지 않을 때가 많단 말이죠. 그렇게 앗차 하는 순간 애매하게 마무리된 대화는 되돌릴 기회도 드물고요.

멀리 갈 것 없이 지난주에도. “글을 왜 쓰세요?” 라는 물음에 “어, 관성...? 잘하는 것도 몇 없는데 그거라도 잘하니까 더 잘하고 싶고 그래서요...?” 라고 한 건 진짜 꽝이었어요.

그렇게 놓친 질문은 이불킥 몇 번에 증발하기도 하고, 까먹은 줄 알았더니만 불현듯 몇 년 지나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번엔 몇 년씩이나 걸리지도 않았어요. 그다음 날 화장실 청소를 하다 아무 생각 없이 흥얼거린 SES의 '달리기', 이 노래에서 답을 찾았거든요. 요즘 10대들도 이 노래 알까, 나 때는 시험 끝나고 노래방 가면 꼭 부르는 노래였는데, 가사를 떠올리는데 어째 이 부분이 걸리는 거예요.

‘이유도 없이 가끔은 눈물 나게 억울하겠죠
일등 아닌 보통들에겐 박수조차 남의 일인 걸’


맞다. 이거네요.
혼자 쓰고 찢어버리는 일기든,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는 에세이든, 억울해서 쓰기 시작한 게 많았어요 저는. 고딩 때 시험점수 낮다고 혼났던 걸 일기장에 한바가지 털어놓고, 신입사원 때 루피병 걸린 스타트업 대표 뒷담화를 연재하던 거 전부.

사실 뭐, 전교 1등도 아니고 대단한 커리어도 없는 평범한 제 경험은 스스로 글이라도 남기지 않으면 의미 없이 그대로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썼죠. 힘든 시간이 아무것도 남기는 바 없이 그대로 사라지는 게 억울하더라고요. 내가 겪는 일들이 아무 의미 없지 않다는 걸 무엇으로든 증명하고 싶었어요. 제가 글을 쓰면 적어도 그 이야기에 대한 기록은 남는 거잖아요. 어쩌면 기록 속에서 나름의 교훈을 찾을 수도 있겠죠.

시작은 억울함이었지만 쓰다 보니 그게 전부도 아니더라고요. 지나가는 짧은 순간, 일상에서 감지한 작은 이상들. 전부 제가 글로 남기지 않으면 쓸모를 찾지 못한 채 사라지는 거잖아요. 의미 없이 날아갈 순간들이라기엔 아쉬운데.

에세이는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을 위한 글이 아닐까, 종종 생각합니다. 내가 보낸 시간들이 무엇이라도 의미로 남는다는 걸 증명하기엔 글쓰기가 최고의 수단이에요. 나 혼자 쓰는 일기도 좋지만, 일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누가 읽어도 괜찮을 글로 다듬고 나면 그 가치는 더욱 높아집니다. 그땐 읽는 사람의 잊힌 시간도 떠오를 가능성이 생기잖아요.

이런 말을 지난주 그 질문에 이어 했으면 좋았을걸. 그래도 그 덕에 지금 이렇게 여러분께 글을 전하고 있으니, 뒷북이라도 의미가 없는 건 아니겠지요?



*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 #64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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