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숨은 재미 찾기 - 내가 차린 한 끼
고기는 어쩜 이렇게 맛있을까. 특히 삼겹살. 지친 하루를 보내고 종종 시켜먹는다. 한 입 씹을 때 주르륵 터지는 육즙에 스트레스도 같이 녹는 기분이다.
그런데 애매하단 말이지. 삼겹살 1인분에 1만 5천 원. 180g은 누굴 위한 1인분일까. 최측근과 둘이 2인분을 시키면 배가 안 찬다. 그렇다고 3인분을 시키자니 부담스럽다. 우리가 부자도 아닌데 평범한 한 끼에 4만 5천 원을 내는 건 너무 방탕하다.
이성을 잃고 더 시키려는 나와 말리는 최측근의 실랑이가 계속되던 어느 날. 명절이 코앞이라고 회사에서 선물 리스트를 보내왔다. 상품권, 과일 세트, 10만 원 선에 맞춰 고른 듯한 선물들 사이 눈에 띈 건 한우와 전기그릴이었다. 그렇지. 그릴이 있으면 한우를 구워먹을 수 있지. 한우뿐일까, 삼겹살도!
여태 그릴을 사지 않은 건 엄두가 안 나서였다. 원룸 생활 10년 차, 먹는 공간과 자는 공간이 같은 게 당연했다. 여기저기 기름 튀고, 냄새 배고, 그 냄새를 자는 동안에도 맡아야 하니까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최측근과 함께 침실과 거실이 나뉜 집으로 이사를 온 게 몇 달 전이었다. 이제 음식 냄새가 침대에 밸 일은 없겠는데? 명절 만세! 1.5룸 만세!
회사에서 한우를 선물 받고, 한우가 오기 전에 전기그릴을 사기로 했다. 엄마가 명절 음식 할 때 쓰던 까맣고 거대한 그릴은 이제 옛 물건이었다. 요즘은 저렴한 제품도 디자인이 제법 괜찮았다. 고기 굽기 좋아 보이는 작고 하얀 세라믹 코팅 그릴은 주문하고 하루 만에 도착했다. 그 위에 소고기를 올렸다. 치이익. 올리자마자 익고, 익자마자 먹는데 우와. 너무 맛있었다. 눈치 보며 가격표를 살필 필요도 없었다. 밖에서 이렇게 먹으면 수십만 원 나왔겠다, 최측근과 박수 치며 감탄했다.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삶. 밖에서 사 먹는 삼겹살 1/3 가격에 그보다 훨씬 맛있는 고기를 실컷 먹게 되었다. 고기는 내가 굽고, 설거지는 최측근이 하고. 기름 튀는 것도, 뒷정리하는 것도 생각만큼 번거롭지 않았다. 배달시킨 음식을 먹으며 나란히 유튜브를 보는 것보다 같이 차린 식탁에 마주앉아 음식 이야기를 나누는 게 훨씬 재밌었다. 고기와 곁들이는 쌈 덕에 채소도 평소보다 많이 먹게 되었다.
전기그릴은 화력이 약해 굽는 것 말고는 신통찮았다. 그럼 뭐 어때, 구울 수 있는 건 다 구워보자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시도해보았다. 애호박이랑 가지, 감자로 시작했다 조금 용기를 내서는 연어 스테이크. 연어 필렛이라는 걸 사면 3만 원도 되지 않는 가격에 손질된 생연어 600그램을 구할 수 있었다. 소금 뿌려 뒀다 씻어내기만 하면 끝. 스테이크로 구워 먹고, 회로 썰어 먹고, 배부르게 먹어도 다음 끼니까지 챙길 게 남았다.
삼겹살과 연어로 용기를 얻은 우리는 비싸서 많이 못 먹는 음식이 뭐 있나 꼽아보았다. 단연 1순위는 갈치조림. 여수에서 먹었던 갈치조림이 정말 맛있었는데, 그거 하나 먹자고 다시 다녀오기엔 너무 멀었다. 서울에서 먹어본 갈치조림은 그만치 맛있지 않았다. 직접 만들어 먹으면 국내산 갈치를 쓸 수 있으니까 생선 맛이라도 더 좋지 않을까? 밖에서 먹는 2인분 가격에 4인분 넘는 갈치를 살 수 있었다. 문제는 양념이었다. 요리를 하도 안 해먹던 탓에 집에 있는 건 고기 구워 먹을 때 쓰는 소금이랑 참기름, 쌈장뿐이었다. 치트키를 쓰기로 했다.
”갈치조림? 웬일로?”
“밖에서 사 먹으면 너무 비싸니까 해먹어볼라고. 갈치 잔뜩 넣어서 배 터지게 먹어야지.”
“뭔 갈치를 얼마나 먹을라고. 집에 재료는 뭐 있나?”
“갈치.”
“양념할 거리는?”
“소금...?”
이럴 때 떠오르는 건 역시 엄마. 갈치조림을 해 먹고 싶다는 말에 의외로 기뻐하셨다. 너희들이 드디어 밥을 해 먹는다고! 필요한 양념이랑 재료랑 다 해서 보낼 테니 갈치만 준비하라고 하셨다. 사흘 후에 어마어마한 택배가 왔다. 마늘, 고추, 양파, 고춧가루 한 통에다 무 대신 넣어 먹으라는 동그란 풋호박까지. 덕분에 라면 끓일 때나 쓰던 하이라이터로 그럴싸한 요리를 한다. 요리래봐야 재료를 씻고, 썰고, 양념을 한 숟가락씩 퍼넣는 것밖에 없었지만.
8시 반부터 시작한 요리는 10시가 되어야 끝났다. 1시간을 조려도 찰랑한 국물. 더 조리는 걸 포기하고 기대 없이 떠먹는데 어? 나쁘지 않았다. 재료가 신선해서 그런가 건강한 맛이 났다. 건강한 맛이야말로 돈 주고 사 먹을 수 없는 것이라 새삼스러웠다.
갈치조림 첫술을 뜨고부터 집에 조금씩 식재료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 어려워 보이던 갈치조림도 어찌저찌 해먹었는데 뭐가 더 어려울까. 먹다 남은 삼겹살로 김치 두루치기, 생닭을 데쳐 닭도리탕, 주말 점심마다 해 먹게 된 파스타. 좋은 재료를 아낌없이 쓰고, 맛이 배어들 넉넉한 시간만 있다면 웬만큼은 그럴싸한 게 나왔다.
간단한 요리니만큼 오래 걸려 봐야 한 시간 반. 힘들이지 않아도 제법 괜찮은 결과물이 뚝딱. 이건 내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세상이었다. 돈 벌러 매일 나가는 회사도, 살기 위해 잠깐 하는 운동도, 하다못해 글을 쓰는 것조차 즐겁기보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좋은 결과를 위해 참는 고통은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칼과 불만 조심하면 간단한 요리들은 힘들 게 없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니까 기다리는 시간도 재밌다.
생각지도 못하게 새로운 재미를 찾았다. 쓸모 있는 모든 일이 힘들기만 한 건 아니구나. 시도조차 엄두 나지 않던 일들도 조금은 문을 두드려보고 싶어진다. 뭐라도 해낼 것 같은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