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숨은 재미 찾기 - 라떼 원정대
아침에 아이스 라떼 한 잔. 1년도 넘은 습관이다. 잠도 깨우고 배도 채우고, 하루를 여는 데 이만한 게 없더라. 어쩌면 요즘 출근길이 힘든 건 라떼를 마시지 않아서일까?
새로운 회사에 출근한 지 3달 남짓. 출근길이 멀어진 건 어쩔 수 없고, 역에서 회사까지 한참 걷는 것도 운동 삼아 할 만하다. 그치만 근처에 괜찮은 카페가 없는 건 참을 수 없다. 빌딩 숲 한복판, 스타벅스랑 커피빈을 양옆에 끼고 있지만 그뿐이다. 아침을 열기에 스타벅스는 심심하고 커피빈은 5000원 넘는 가격이 부담스럽다. 그나마 근처에 3300원짜리 라떼를 파는 곳이 있지만 맛이 복불복, 어떤 사람이 어떤 기분으로 내어주는지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심할 땐 한 입 마시고 버릴 수준인데 이럴 바에야 굶고 말지, 커피 삼각지대에서 입맛을 잃고 아침 라떼를 아예 끊어버렸는데 잘한 걸까. 요즘 정신이 흐리멍덩한 게 이것 때문인가 의심해볼 만하다.
여느 시절이었다면 절제의 미학이라던가, 카페인에 의존하지 않는 삶이라던가, 그럴싸한 이유를 찾아 그냥저냥 커피 없이 살았을 거다. 하지만 생활 속 재미를 찾기로 한 만큼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맛있는 커피를 마셔야지. 지도 앱을 켜고 '카페'를 검색해 보니 조금 돌아가는 먼 길에 카페 몇 곳이 있다. 900원짜리 커피로 유명한 곳부터 처음 보는 동네 카페까지 다양하다. 원체 여유 있게 출근하니까 10분 정도는 더 걸을 수 있지. 그렇게 매일 한 군데씩 카페 도장깨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메뉴판 가격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내 일급보다는 쌀 테니 그걸로 아침 출근길이 조금이나마 버틸만해진다면 무조건 이득이다.
그렇게 출근길은 맛있는 커피를 찾아 떠나는 모험길이 되었다. 내친김에 노션 문서도 한 장 만들었는데, 제목은 '라떼 원정대'. 카페 이름, 아이스 라떼 가격, 맛과 소감을 매일매일 적어넣었다.
✔ ㄱ 카페. 라떼 3800원, 나쁘지 않은데... 탄맛이 난다. 쓴맛? 탄맛? 이거 먹을 거면 회사 앞에서 복불복 커피 마시는 게 낫겠다.
✔ ㄴ 카페, 라떼 5000원, 적절한 산미와 탄맛이 어우러진 진한 커피. 맛있는데 이 거리를 걸어와서 매일 먹을 만큼 좋은 맛과 가격인지는 의문.
✔ ㄷ 카페, 라떼 4500원, 누구에게나 좋을 무난한 부드러움. 건널목 건너야 마실 수 있는 건 은근히 부담이다.
이렇게 이어지는 카페 정보가 이제는 여섯 곳. 조금씩 길어지는 문서를 보니 마음 깊은 데서 보람이 차오른다. 이런 걸 적극적으로 쓰는 잉여는 이 바쁜 동네에 나뿐일 거다. 내가 올해 쓴 문서 중에서 가장 쓸모없는 게 이 카페 목록인데, 철저하게 아이스 라떼 후기만 적어둔 건 둘째치고 출근길이 멀어지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마실 만한 커피는 어디서도 팔지 않았다는 게 함정이다. 하지만 재밌었다. 이렇게 나 하나만을 위해 정보를 모으고 기록하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번 라떼 모험 덕분에 기분 따라 들러볼 카페가 많아졌다. 아마 대부분은 멀리 가기 귀찮아서 회사 앞 3300원짜리 라떼가 맛있길 바라며 포춘쿠기 열어보듯 테이크아웃하겠지만. 내가 원할 때 더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거, 필요한 정보가 있을 때 이렇게 글로 써 두면 재밌다는 거, 두 가지나 알게 되었으니 모험의 전리품으로 충분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