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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y 18. 2023

지속 가능한 백수 생활 루틴

#6. 3달 동안 다듬어 온 ver 3.0 공개

벌써 5월도 반이나 지나갔다. 아침저녁 공기가 따뜻하다 못해 더워졌다. 이제 곧 매미가 울고, 모기가 나를 무는 계절이 온다.


백수 생활을 시작하고 3달 되었다. 주위의 반응은 ‘아직 3달밖에?’와 ‘벌써 3달이나?’ 반반. 그래도 실업급여 4달 더 받을 수 있다고 하면 다들 부러워한다. 한참 남았으니 더 즐겨도 되겠다는데, 글쎄. 내 마음은 조금씩 타들어간다. 지난 3달이 짧았던 것처럼 앞으로 4달도 눈 깜짝할 새 지나갈 것이다. 시간을 조금 더 알차게 보낼 루틴이 필요한 시기다.


이번 글에는 내가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다듬어 온 백수 생활 패턴의 역사를 담았다. 느슨해진 생활에 긴장감을 주고 싶은 백수 동료들, 좋은 기회로 몇 달 쉴 기회를 얻게 될 분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Ver 1.0: 계획된 무계획


백수가 되고 첫 달은 친구들 만나는 데 시간을 다 썼다. 맛있는 밥 많이 얻어 먹고, 친구들이 해 주는 조언도 열심히 들었다. 친구들은 크게 세 가지 말을 건넸다.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참에 실컷 쉬어!” 였다. 이렇게 듣기 좋은 말이 또 있을까. 그렇게 했다. 하루에 잠을 12시간 자면서 깨어 있는 시간엔 주구장창 게임을 했다. 처음엔 마냥 즐거웠다. 하지만 며칠 지나니 초조해졌다. 아무리 백수라도 이렇게까지 놀고 먹어도 괜찮은 걸까?


“어디 여행이라도 길게 다녀와!” 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이건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여행은 애초에 즐기지 않아 시도해볼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여행 며칠에 큰돈을 쓰기보다 백수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으로 하는 게 나에겐 중요했다.


내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준 말은 이거였다. “이참에 하고 싶은 거 실컷 해봐!”



Ver 2.0: 직장인보다 바쁜 백수


평소에 버킷리스트라도 써둘 걸 그랬나.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저곳 돈을 썼다. 비뚜름한 자세를 바로잡고 싶어 주4회 운동을 등록했고, 어딘가 힙해 보이는 미디 작곡 수업을 신청했다. 평일 낮이라 엄두를 내지 못했던 소설 쓰기 기초반도 수강했다. 남는 시간엔 빨래며 청소 같은 잡다한 집안일을 했다.


할 일을 가득 채우니 더는 스스로가 잉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가니 시간을 알차게 쓰는 것 같아 뿌듯했다.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바빠졌다.



Ver 2.5: 선택과 집중


잠깐, 백수가 회사 다닐 때보다 바쁜 게 말이 되나? 2달이 훌쩍 지난 다음에야 의문이 생겼다. 나는 바쁜 게 아니었다. 시간을 엉망으로 쓰고 있는 거였다.


일정을 뜯어보니 문제가 있었다. 화요일과 목요일 낮 2시에 가던 자세교정 운동이었다. 하루의 중심 시간을 여기에 쓰니 생활 패턴이 꼬였다. 건강하게 살자고 챙기는 운동이었는데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모든 운동은 오전 시간대에 해치우기로 했다. 낮에 하던 운동은 홈트레이닝으로 대체했다. 저녁에 하던 운동도 오전 시간대로 바꾸었다. 효과는 굉장했다. 운동하고 나면 배가 고프니 점심을 제때 챙겨먹게 되었다. 간단한 집안일 얼른 끝내면 점심 먹고부터 온전히 내 시간이다.



Ver 3.0: 내가 실컷 하고 싶은 것


백수 생활 3달 만에 하루가 길어졌다. 긴 하루를 어디에 쓰면 좋을까. 이제야 계획이라는 걸 세우게 되었다.

그때 떠오른 게 소설 수업 선생님의 말이었다. 좋은 소설 많이 읽고, 읽은 만큼 쓰면 잘 쓰게 될 거라는 말.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읽고 쓰는 시간을 따로 잡아두기로 했다.


백수 되고 가장 잘한 일이 소설 수업을 듣기 시작한 것이다. 언젠가 써보고 싶다며 생각만 하는 것과 실제로 쓰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재능이 없다는 건 확실히 알게 되었지만,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일찍 배우길 잘했다 싶다. 쓰다 보면 조금씩 괜찮아질 테니까. 당장 멋진 소설을 쓰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세우지 않았다. 언젠가 멋진 소설을 쓸 기초를 다지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시간이 될 것 같다.


아침 운동과 집안일, 점심부터는 책 읽고 뭐라도 쓰기. 뿌듯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엔 실컷 늘어지기. 이런 생활이면 평생 할 수 있을 것 같다. 남은 4달은 이런 하루를 보내면 좋겠다.


몇 달 기다리던 게임이 출시한 바람에 조금 불안하지만, 매일이 힘들면 이틀에 한 번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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