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근육보다 더 중요한 것
우리 동네 체육센터 지하에는 수영장이 있다. 내가 신청한 필라테스 수업은 1층에서 하는데, 앞 시간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면서 유리창 너머 수영장을 바라보곤 한다. 운이 좋으면 사람들이 수영하는 걸 볼 수 있다. 까만 물안경을 끼고 형형색색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 화려한 접영도, 느긋한 배영도,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생존 수영도 물방울이 튀어 오르는 생기가 느껴져 좋다. 언젠가 나도 저기서 수영을 해 보고 싶다. 물에 뜨지도 못하는 왕초보지만 상상은 해볼 수 있다. 코를 찌르는 염소 냄새를, 레일 사이로 팔다리를 허우적대는 내 모습을.
운동을 싫어하던 내가 주 4일 체육센터에 출석한 지 2달이나 되었다. 월수는 필라테스, 화목은 자세교정 운동. 필라테스는 살기 위해 계속해 온 운동이고, 자세교정은 회사를 그만두고서 한낮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 신청했다. 지금도 캘린더를 보면 빼곡하게 들어찬 운동 일정에 놀라곤 한다. 세상에. 내가 운동을 이렇게 자주 하다니. 하루라도 헬스장에 출석하지 않으면 근손실이 온다는 분들은 코웃음 치겠지만, 집에서 뒹굴거리는 게 일상인 나에게는 엄청난 변화다.
2달 전 캘린더에 새 일정을 채울 땐 작은 기대가 있었다. 운동 많이 하니까 살이 빠지겠지? 이러다 배에 일자 복근 딱 생기는 거 아냐? 물론 아니었다. 먹는 게 바뀌질 않았으니 듬직한 체형도, 푹신한 지방도 그대로다. 꾹꾹 눌러보면 온몸이 말랑말랑하다. 하지만, 헙! 힘을 주면 느낄 수 있다. 두꺼운 지방 아래 무언가 있다. 소중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던데, 작고 소중한 나의 근육도 마찬가지다. 근육이 생기면서 체력도 조금 좋아진 듯싶다. 만성피로와 무기력증이 줄어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쩌면 운동이 아니라 퇴사하고 쉬는 것의 효능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운동이 만들어낸 가장 좋은 건 근육이 아니다. 그 아래 든든히 자리 잡은 맷집이다. 백수생활은 나 자신과의 싸움 연속이다. 아무리 실업급여를 받는다지만 맘 속 깊은 불안은 금융치료가 되질 않는다.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나중에 괜찮은 회사 들어갈 수 있을까? 이대로 밥이나 축내며 여생을 보내게 되는 건 아닐까? 잊을 만하면 정권지르기, 발차기, 하이킥이 들어온다. 한 방씩 모두 아프다. 그래도 아직은 KO당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면서도 버텨내는 게 주 4회 운동으로 만든 맷집 덕분이다. 나 아무것도 안 하는 거 아니거든? 밥 잘 먹고 운동까지 하고 있거든? 헙! 힘 주면 저 어디 근육도 있거든!
딩동댕동, 정각 5분 전에 울리는 체육센터 종소리가 들린다. 수영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레일을 비우고 있다. 나도 이제 필라테스 수업에 들어가야겠다. 이번 달부터는 좀 더 난이도 높은 오전 수업을 신청했다. 오랜만에 일찍 일어났더니 자꾸 눈이 감기는데, 번쩍 다시 쨍하게 떴다.
안녕하세요! 활짝 문을 열고 선생님께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이 놀랐다.
"어라, 이 시간에 수업 들을 수 있어요? 일 안 하세요?”
네, 하는 일 없어요, 머쓱하게 답하고 얼른 빈자리로 쏙 들어갔다. 마음이 살짝 휘청거렸다. 맷집을 더 열심히 키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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