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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y 17. 2023

퇴사하고 부자가 되었다

#4. 걱정 말고 기대할래

2700원짜리 아이스 라떼를 쪼옥 마셨다. 빙그레 웃음이 났다.

그래, 맛이 없으려면 이 정도로 없어야 재미라도 있다. 회사 다닐 때 정신 차리려고 마시던 수백 잔의 커피가 생각났다. 아득한 옛날 같지만 겨우 2주 전이다.


퇴사 결정이 나고 가장 먼저 소설 쓰기 수업을 등록했다. 예전부터 듣고 싶었는데 평일 낮에 하는 거라 엄두도 못 냈다. 8주에 35만 원, 3초 정도 망설여졌지만 지금 놓치면 영영 시작도 못할 것 같았다. 퇴직금이 들어오면 오랜만에 부자가 될 참이었다. 뭐 어때! 이것도, 저것도, 평소에 해보고 싶던 걸 죄다 찾아 일정에 맞는 걸 전부 신청했다.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바빠졌다.


- 월요일, 수요일 21시: 필라테스 (회사 다닐 때부터 하던 것)
- 화요일, 목요일 14시: 자세교정 운동
- 목요일 20시: 미디 작곡 수업
- 금요일 11시: 단편소설 창작 수업


생계를 함께 꾸리는 최측근이 흔쾌히 허가해줬다. 취업 전까지 나는 월 300만원 하던 저축을 잠시 멈춘다. 한 달 실업급여 중 100만원을 교육비로 쓰고 나머지 돈을 저축하되, 용돈이 필요하면 그조차 몰래 떼 가도 된다. 벌지도 않고 쓸 생각부터 하는구나 싶지만 이런 기회 또 없다. 직장생활 시작하고 처음으로 실업급여 수급 자격을 갖췄다. 시도때도 없던 업무 요청도 이젠 없다.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돈과 넘치는 시간이 있다. 나는 절반 정도 부자가 되었다!


시간과 돈, 무릇 두 가지를 모두 갖춰야 부자라고 생각해 왔다. 회사 다닐 땐 시간이 없었다. 돈이라고 많을 리가, 그저 주말 이틀이나마 행복하려고 월화수목금 야근을 버텼다. 지금은 시간 하나만이라도 풍족해졌다. 넘치는 시간 너머 어떤 내가 있을지 궁금해졌다.


내 일정을 살피던 최측근이 그랬다.

“완전 드라마에 나오는 부잣집 사모님 스케줄이다. 발렛파킹 되는 백화점 가고, 문화센터 강의 들으면서 교양 쌓고, 느긋하게 라운지에서 커피 마시고.”

“부잣집 사모님보다 내가 낫지. 속썩이는 남편도 자식도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면허도 없네. 시간 될 때 운전면허도 따 둘까.




그렇게 일정에 맞춰 돈과 시간을 열심히 쓰고 있다.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바쁘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던 일상에서 튕겨나오니 하루하루 새로운 일뿐이다. 캘린더가 재밌는 일로 가득 찼다. 8시간 수면으로 얼굴이 밝아졌고, 필라테스로 구부정한 어깨가 펴졌다.  점심 메뉴나 적던 일기가 새로운 이야기로 가득 채워졌다.


바쁜 백수에게 모두가 박수를 쳐 주진 않는다. ‘참 대중없이 이것저것 한다’는 말도 들었다. 당분간은 실업급여가 나오지만 그 다음은 모를 일이다. 일자리를 못 구할 수도 있고, 갑자기 큰 돈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 나도 안다. 내가 제일 잘 안다. 하지만 그걸 지금 걱정해야 할까? 긴 휴가를 받았는데 ‘지금 쉬면 나중에 회사 가서 더 힘들겠지? 쉬지 말아야겠다’ 할 사람 얼마나 될까. 돌아갈 회사도 없는 내가 그러면 바보다.


가시 돋은 말은 금방 털어냈다. 내가 누구인가. 온갖 걱정을 사서 하던 회사원 여름이 아니다. 운 좋게 휴가를 즐기는 백수 여름이다. 강해진 나는 예상치 못한 나쁜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생각지 못한 좋은 일을 기대한다. 걱정보단 기대가 더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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