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내 삶의 동력은 빡침이었다
월요일 점심 시간. 팔로우하던 공연 정보 계정이 5주년 기념 행사를 한다기에 다녀왔다. 장소가 마침 최측근의 회사 근처인데다 기념 굿즈가 탐났다.
작은 LP바를 빌려 꾸며 둔 행사장에 들어가니 계정 운영자로 추정되는 분이 맞아주었다. 이분이 작년 페스티벌에 ‘나락도 락이다’ 깃발을 들고 다니셨구나. 깃발은 자주 보았는데 깃발 주인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다. 벙거지 모자를 눌러 쓴 모습이 누가 봐도 음악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분이 웰컴 드링크라며 차가운 과일 주스를 하나씩 손에 쥐여주었다.
주스를 입에 물고 행사장을 둘러봤다. 지난 5년 동안의 활동 내역이 아기자기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공연 정보를 알려주는 계정인 줄 알았는데 그 이상으로 다양한 걸 해온 게 눈에 들어왔다. 여행사와 함께 해외 페스티벌 패키지여행을 기획하기도 했고, 음악이랑 페스티벌에 대한 책도 두 권이나 냈더라.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운영자가 모아 온 국내외 페스티벌 전리품이었다. 페스티벌 입장할 때 끼는 손목 팔찌가 수십 개는 되었다. 우리도 매년 가는 재즈 페스티벌이나 락 페스티벌은 물론, 해외 페스티벌 티켓까지 심심찮게 보였다. 잠깐만 둘러볼 생각이었는데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서둘러 근처 식당에 들어왔다. 점심은 대충 먹어야겠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다. 좋아하는 걸 이렇게 진심으로 좇는 사람이 있구나, 멋지다, 저 멀리서 감동이 밀려왔다. 그런데 이상한 질문 하나도 둥실 따라왔다.
“운영자 분은 회사를 안 다니시는 걸까? 아니면 오늘 연차 쓰신 걸까?
“흠, 연차 아닐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돈 벌려고 운영하는 계정처럼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돈 나갈 일이 더 많을지 모른다. 운영자는 회사원이든 프리랜서든 직업이 따로 있는 사람일 것 같다.
사실 궁금한 건 돈보다도 시간의 출처다. 공연 보는 거야 그렇다 쳐도, 이런저런 이벤트랑 행사를 준비하려면 시간이 만만찮게 필요할 듯싶었다. 일을 하면서 그만큼 시간을 낼 수 있나? 아니면 혹시, 일을 하니까 오히려 시간을 낼 수 있는 걸까?
구 직장인, 현 백수로서의 경험을 털어보건대 나는 직장인 때 시간을 훨씬 알차게 썼다. 평일에 퇴근하면 운동하고, 글 쓰고, 책 읽고. 주말이면 여기저기 야무지게 놀러 다녔다. 백수인 지금은 무엇하나 그만큼 열심인 게 없다. 소파에, 침대에, 방바닥에 널부러져서 온종일 게임이나 하기 바쁘다. 시간은 매일 소소한 일들로 붙잡을 틈 없이 사라진다.
인정하기 싫은 사실 하나. 회사가 주는 빡침은 내 삶의 동력이었다. 해도 해도 쌓이는 일, 말 안 통하는 사람, 예측할 수 없는 사건사고까지. 한참을 시달리다 집에 온 날이면 이상한 오기가 불타올랐다. ‘이렇게 하루를 끝낼 거야? 내 인생을 회사만으로 채우는 건 억울하지 않겠어?’ 그 덕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뭐라도 했다. 시간을 악착같이 끌어다 썼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 놀고 먹고 자기 바쁘다.
백수 생활은 행복하다. 진짜, 정말, 더없이. 내가 아는 모든 수식어를 가져다 넣고 싶을 정도다. 가끔, 아니 종종 ‘이렇게 평생 살면 어떨까’ 생각할 정도다. 세상엔 재밌는 게 너무 많다. 질릴 만하면 신작 게임이 나오고, 좋아하는 작가가 신간을 낸다. 페스티벌이며 공연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행복할 일이 끊이질 않는다.
그치만 이렇게 얻는 건 아주 단순한 행복이다. 예쁘지만 금방 사라져 버리는 비눗방울 같다. 크고 단단한 행복은 빡침을 딛고 일어날 때에야 만들어진다. 탄소가 높은 열과 압력을 받았을 때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백수가 된 나는 행복하다. 그래서 딱히 대단한 걸 해내야겠다는 욕심이 없다. 이대로 살면 충분한데 굳이 무언가를 더 해야 할까. 그렇게 놀고 먹고 자는 일상이 반복될 뿐이다.
돈이 많았다면 평생 이렇게 살았을 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통장 잔고가 몇 달치 남지 않았다. 결국은 다시 직장인이 되어야 한다. 그걸 기억해낼 때마다 조금 슬프다. 그래서 굳이 회사의 순기능을 미리 찾아내고 있다. 회사에 다니면 다시 빡침 에너지를 쌓을 수 있다. 그 에너지로 뭐라도 멋진 걸 해내고 싶어질지 모른다.
회사 다닐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조금 빡친다. 이번 글은 그 빡침 에너지를 끌어다 썼다.
* 제 글을 가장 먼저 읽고 싶으시다면?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을 구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