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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Feb 11. 2017

나는 언제나 떠나온 곳을 뒤돌아본다

이사 온 지 한 달째, 자주 하는 말이 생겼다.

  이사 온 지 한 달째, 자주 하는 말이 생겼다.

  "예전 살던 데가 그건 참 좋았는데."


  이 동네로 이사 오기 전까지 나는 쭉 서울 북쪽 끝 어느 대학교 근처에 살았었다. 창문 없는 고시원에서 3년, 외풍 심한 자취방에서 3년. 그 시절 나는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느긋한 학생이었으니 그 동네 지도는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구석구석 샛길에서 이어지는 예쁜 산책로, 파르페가 맛있던 단골 카페, 밤늦도록 신청곡을 틀어주는 칵테일 바 위치까지.


  아차, 파르페 카페는 이제 없다. 사장님은 예고 없이 카페 문을 닫고는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카페 페이스북 계정에 출근길 동호대교 사진을 올리셨다. 그새 직장인이 되셨단다. 그 카페만 데려가면 파르페를 시키고는 "이런 영롱한 건 찍어놔야지!"하며 사진을 찍던 친구는 대학원 가더니 소식이 뜸하다. 칵테일바는 아직 남아 있지만, 신청곡을 잔뜩 걸어두고 밤늦도록 흥미진진 연애 썰을 풀던 선배는 그새 가정을 꾸려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 시절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많은 것들이 떠나간 그 자리에 나도 이젠 없다. 그곳을 떠난 나는 카페에서 파르페 대신 라떼를 주문한다. 처음 가는 술집에서도 민증 검사를 받지 않는다. 누가 봐도 국민연금을 성실히 떼이는 직장인인가 보다. 이렇게 미용실에 와도 "전공이 뭐예요?" 대신 "무슨 일 하시나요?"라는 말을 듣는.


  앞머리가 눈을 찌르는데 직접 자르기가 귀찮아 미용실에 왔다. 몇 주 전 앞머리를 손톱만큼 자르고 오천 원을 낸 아픈 기억이 있어 일부러 동네 작은 미용실로 골라 들어왔는데 디자이너 분의 포스가 남다르다. 그전까지 어느 디자이너 분도 손보지 않았던 잔머리까지 한 올 한 올 다듬어주신다. 앞머리에 돈 쓰는 게 아깝지 않은 미용실은 여기가 처음이다. 거울을 보고 내심 놀라며 나왔다. 여긴 앞으로 단골 해야지.


  기분이 좋아져서 집 근처 카페에 왔다. 스탬프 한 장을 벌써 반이나 채운 이 카페는 올 때마다 주인의 취향에 감탄하게 된다. 은은히 흘러나오는 Lost stars도, 꽂혀있는 심보선의 시집도 어쩜 이렇게 마음에 드는지. 혼자 글을 쓰기도 좋고 친구와 나긋나긋 이야기를 나누기도 딱이다. 스탬프를 다섯 장 채우면 VIP가 된다는데 한두 달 안에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은 심지어 라떼에 귀여운 토깽이도 한 마리 올라와 있다. 심쿵.



 이만하면 아쉬울 게 없는 새로운 일상인가? 하지만 은둔고수가 있는 동네 미용실도, 집에서 코앞인 취향저격 카페도 나의 "예전이 좋았는데!"는 막지 못할 거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내 인생의 이전 페이지를 들춰보고 싶어 지겠지. 밤새 사랑과 사람을 논하던 벗들도, 서너 시간을 일없이 걸어 다니던 체력도 이젠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래도 분명, 몇 년이 지나면 나는 이 순간을 못내 그리워할 거다. 좋아하는 카페에서 느긋하게 글을 쓰는 지금을. 친구에게 "여름님 글 언제 쓰세용?"하고 카톡 오는 지금을. 짧은 앞머리가 어울리는 마지막 시기일 이 순간을 참 좋은 시절이었다고 말할 거다. 나는 언제나 떠나온 곳을 뒤돌아보는 사람이니까. 이 시절을 들춰볼 미래의 나를 위해 작은 글씨로 적어두고 싶다. 난 지금 행복하다고. 그러니 가끔 이 시절을 그리워해 달라고. 하지만 너는 너대로 지금 행복을 찾아가고 있지 않냐고. 분명 그럴 거라고.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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