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를 위한 사전 답사 기간
소유트알란 마을에서 조사는 2016년 7월부터 시작 예정이었다. 지금까지 오로지 관공서 홈페이지나 위키피디아, 마을의 페이스북 등 온라인 자료만을 기반으로 마을의 정보를 모았기 때문에 현장 답사가 필요했다. 더불어, 마을에서 우리의 조사를 허락해야 했기 때문에 3월에 조별로 마을을 방문했다.
전체 인원은 14명, 무스타파케말파샤에 도착했다. 튀르키예는 81개의 주로 이루어져있고, 그 중 하나가 부르사다. 무스타파케말파샤는 부르사에 속한 구였으며 그 중 우리가 선별한 마을은 다섯군데였다. 보통 2인 1조로 움직였으나 예외적으로 우리조는 3인 1조였다.
인류학에 흥미를 느낀 간호사 셀필 아블라는 육아와, 3교대를 병행하는 철인이었다. 또 다른 조원은 큐브라. 매사에 의욕적이고 승부욕이 강하면서 주변을 잘 챙기는 큐브라는 학부 3학년과 4학년 때 나의 좋은 파트너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나의 조원, 팀원이라는 뜻에서 에키빔(ekibim)이라고 불렀다.
우리 14명은 무스타파케말퍄사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교직원용 숙소에 짐을 풀었다. 외레트멘 에비(Öğretmen evi)라고 하는데 본래 목적은 교직원 및 교육부 소속 공무원이나 그 가족들이 사용하는 숙소다. 튀르키예는 국가 교사 고시를 패스하면 주소지와 관계 없이 정부에서 발령을 보낸다. 심지어 대다수의 공무원은 ‘특수지’로 불리는 북동부 지역에서 의무적으로 근무해야한다. 그러다보니 그들을 위해 정부에서 거처를 제공한다. 그러나 일반 시민도 공실이 있는 경우 여행와서 일반 숙박 목적으로 사용 가능하다. 다행히 빈 방이 많아서 2박 3일간 머물 수 있었다.
이틀간 우리는 시내에서 마을로 오가며 조사한 내용을 기반으로 마을을 탐방하고, 이장님을 만나 조사에 대한 허락을 구해야 했다. 소유트알란은 시내에서도 차로 20-25분 가까이 떨어진 산속에 있는 마을이라 교통편이 마땅치 않았다. 돌무쉬(Dolmuş)라는 옵션이 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았다. 돌무쉬는 일정 구간을 다니는 마을버스다. 다만 정차역이 따로 정해져있지 않아 구간 내에서 아무때나 탑승이나 하차가 가능하다. 요금 역시 구간에 따라 정해져있어 튀르키예인들이 애용하는 교통 수단이다. 우리가 갔던 당시 마을로 가는 돌무쉬는 하루에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왔다갔다 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셀필 아블라와 큐브라, 나 이렇게 셋은 케말파샤에서 마을로 택시를 탔다.
꼬불꼬불한 길들을 지나 한참 달리니 길 오른편에 작은 마을 전용 묘지와 함께 마을 입구가 나왔다. 마을 입구 왼편엔 지금은 텅 빈 작은 진료소가 있었고,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니 공터가 나왔다. 택시는 공터에 우리를 내려줬다. 공터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나무가 있었고 마을의 카흐베(kahve)가 있었다.
카흐베는 커피라는 뜻인데 마을의 사랑방이다. 아저씨들은 카흐베에 모여 차를 시키고 함께 텔레비전을 보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오케이라는 루미큐브같은 게임을 즐긴다. 카흐베의 특이점은 남성들만 있다는 것. 법으로 금지한 것은 아니나 여성들은 들어가지 않는다. 심지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마을 아주머니들은 카흐베 앞을 지날 때면 카흐베쪽을 쳐다보지 않고 지나간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마을 공공의 사랑채인 느낌이다. 8,000km 이상 떨어진 나라에서 뜻밖에 남녀칠세부동석을 경험했다.
그러나, 조사를 떠나기 전 교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여러분은 학술 목적으로 연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카흐베에는 많은 대화들이 오가고 여러분은 마을의 여러 모습을 그 안에서 포착할 수 있을 거예요. 여학우분들 당당하게 들어가세요. 반대로 마을 아주머니들이 모여 음식을 만드는 곳이나 뜨게질을 할 때 남학우분들도 함께 가세요. 여러분은 관찰자입니다.”
셀필 아블라와 큐브라는 튀르키예인이었고, 특히 40대인 셀필 아블라는 이런 상황이 조금 더 부담스러울 수 있었다. 그럴 때는 누가 봐도 외국인인 내가 오히려 유리했다. 모르는 척, 교수님의 말을 떠올리며 카흐베 문 앞으로 당당히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이스탄불대학교 인류학과에서 온 학생들입니다. 이장님을 뵙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사실, 택시가 공터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탄 차를 주시했고, 공터에 내리자 카흐베에 있던 아저씨들은 일제히 우리를 쳐다봤다. 안에 있는 아저씨들도 창밖을 기웃거렸다. 우리가 다가가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시던 차에 웬 동양인 여자애가 자기들 말로 인사를 하니 얼떨떨한 표정으로 카흐베 안쪽을 가리켰다.
차이를 따르던 분께서 나오며 자신을 이장이라고 소개했다. 세닷(Sedat)이라는 이름의 이장님은 키가 크고 말랐으며 차분한 분이셨다. 여유롭지만 강단있는 말투를 사용하셨고 깊은 눈을 갖고 계셨다. 이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셀필 아블라가 우리가 마을을 찾아온 연유를 설명했다. 이장님은 흔쾌히 허락하셨다. 그리고 카흐베 안에 있는 아저씨들부터 시작해 우리와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소개시켜 주셨다.
“이스탄불에서 온 대학생들이에요. 7월에 우리 마을에 머물면서 농사나 양치는 일 같은 걸 조사한대요. 다들 이 아이들 보면 잘 좀 도와줘요.”
처음에는 존칭을 써서 ‘세닷 베이(Sedat Bey)’라고 불렀지만, 이장님은 편하게 부르라고 하셨다. 마을 아이들은 그를 ‘세닷 아비(Sedat Abi)’-형 또는 오빠를 일반적인 관계에서는 친한 손위 남성에게 사용. 삼촌이라는 느낌으로 사용 가능-라 부르며 삼촌처럼 따랐고, 우리도 자연스럽게 그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세닷 아비 덕분에 우리는 반나절동안 마을을 돌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마을을 돌던 중 푼다(Funda)와 셀린(Selin)이라는 고등학생 여자아이들을 만났다.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3대째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동갑내기 친구들이었다. 푼다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차와 과자 등을 내주었고, 어머니께선 저녁을 먹고 가라고 권하셨다. 그러나, 숙소로 돌아가 팀모임을 할 시간이 다가와 정중히 거절하고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씀드렸다.
숙소로 돌아와 다른 마을을 다녀온 동기들과 만났다. 저녁을 먹고 만나기로 하고 밥 먹을 곳을 찾았다. 나는 동기 중 가장 친한 곤자(Gonca), 야마치(Yamaç), 우푹(Ufuk)과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흑해식 피데’라는 가게로 향했다. 방랑가 기질이 있어 수시로 여행을 다니는 야마치 말에 따르면 정말 흑해식 피데의 정수였다. 맛있게 먹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간단하게 하루 일과를 나누고 기록을 남겼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부터 마을에 가야 했기 때문에 모두 일찍 잠에 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