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트알란의 딸이 되다
아침 일찍 마을로 향했다. 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기 위해 오전부터 구석구석을 누볐다. 사실 이 일정은 일종의 상견례였다. 4주간 머물 마을이기에 마을 사람들이 우리의 방문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마주칠 때마다 많은 분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주셨다.
“안녕, 오늘도 왔구나. 오늘은 뭐 할 거니?”
“이스탄불에서 왔다는 학생들이 너희구나. 여기서 무얼 한다고?”
모두가 우리가 왜 이곳에 왔는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모두가 나를 힐끗거리며 바라보았다. 푸근하게 맞아주긴 했지만, 타지인에 대한—특히 낯선 동양인에 대한—경계심이 역력했다. 이스탄불로 돌아와 교수님께 그 이야기를 전했다. 마을 사람들이 나를 경계하는 것 같다고 말씀드리자, 교수님은 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니, 외국인은 학생이 처음일 거예요. 하지만 조사를 하며 그분들께 당신을 납득시키고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조사 활동의 일환입니다. 관계 속에서 비로소 마을 사람들은 당신이 찾는 답을 줄 거예요.”
조사에 나가기 전, 지도 교수님께서는 우리의 조사 계획서를 작성해 부르사 주지사에게 전달하셨다. 부르사 주와 이스탄불 대학교 총장, 담당 지도교수의 서명이 들어간 허가서에는 조사 활동에 대한 지원과 학생들의 안전을 부탁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2016년 7월 10일, 한 달 동안 쓸 짐과 식재료를 챙겨 마을에 당도했다. 이장님께 교수님이 주신 조사 허가서를 전달했고, 마을에 헌병소가 있어 그곳에도 한 부를 제출하며 조사 일정을 알렸다. 정부의 공식 허가를 받은 4주간의 참여관찰조사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 주에는 별도의 인터뷰를 진행하지 않았다. 교수님께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교류하며, 마을 사람들과 먼저 친해지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매일 집집마다 찾아가 인사를 드렸고, 초대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들어가 차를 마시며 얼굴과 이름을 익혔다. 차를 마시다 식사 시간이 되면 찻잔이 치워지고, 어느새 상이 차려졌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마을에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을에 온 지 열흘째 되던 날, 어느덧 마을 생활에 익숙해진 우리는 하루에 세 집씩 다니며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했다. 길어진 여름 해가 무색하게, 우리는 매일 땅거미가 질 즈음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지낸 곳은 마을 농업협동조합 건물이었다. 협동조합 2층의 비어 있는 직원용 숙소를 이장님께서 사용할 수 있도록 내주셨다.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중간 지점에 있고 사방이 트여 있었으며, 이장님 댁과는 걸어서 5분 거리였다. 길가에 위치해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람의 왕래가 잦아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유독 늦게 귀가한 날이었다. 사방이 어두워져 땅과 하늘의 경계가 흐려진 시간, 협동조합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비릿한 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미처 식지 못한 지열이 그 냄새를 더 역하게 만들었다. 옆에는 큐브라와, 마을의 팔방미인 일꾼인 하칸이라는 남자아이가 함께 있었다. 두 사람에게 냄새 이야기를 하자, 뭔가 냄새가 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비리지는 않다고 했다. 나는 냄새에 특히 예민했고, 큐브라는 유독 코가 둔한 편이었다.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냄새가 짙어지는 곳으로 다가갔다. 마당은 무언가에 흥건히 젖어 있었고, 그 얼룩은 길게 이어져 협동조합 건물을 한 바퀴 감싸고 있었다. 피였다.
핸드폰 플래시를 켜며 큐브라와 하칸을 불렀다. 하칸은 가끔 동네 개들이 풀어놓은 닭을 잡아먹거나 무는 일이 있다며, 개들의 짓일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주변에 닭털이 있어야 했는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한 마리의 닭에서 나올 양도 아니었고, 개가 굳이 닭을 물고 우리 건물을 한 바퀴 돌 이유도 없었다.
이미 집에 돌아와 있던 셀필 아블라를 불렀다. 열린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셀필 아블라에게, 집에 들어올 때 주변에 피가 뿌려진 것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못 봤다고 했다. 그렇다면 셀필 아블라가 들어간 뒤 우리가 도착하기까지, 두 시간 이내에 벌어진 일이었다. 개나 닭이 싸우는 소리, 혹은 다른 기척은 없었느냐고 묻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피 냄새에 모기가 들끓기 시작했고, 물청소가 시급했다. 처음 겪는 일에 놀랐지만 침착하게 이웃집에 상황을 설명하고 빗자루를 빌려왔다. 물을 받아 바닥에 뿌리며 빗자루질을 하는데, 나를 경계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저 외국인과는 말하지 않겠다며 조사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했던 아주머니, 나를 보자 오던 길을 되돌아가던 아저씨의 모습도 떠올랐다.
핏자국을 지우던 중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행히 옆에 있던 셀필 아블라가 돌봐준 덕분에 금세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날 밤의 일은 삽시간에 온 마을로 퍼졌다. 다음 날,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걱정 어린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나는 어제 아침처럼 웃으며 인사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조사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다음날, 마을 아이들을 초대해 팬케이크를 구워주며 함께 놀았다. 저녁에는 그 집에 초대받아 팝콘을 튀겨 먹고, 아주머니와 밤새도록 수다를 떨었다. 다음 날에는 아주머니가 이웃집에 차를 마시러 갈 때 함께 따라갔다. 커피를 마시며 한국에 있는 가족 이야기, 이스탄불에서의 생활을 들려드렸다. 한국도 가족 중심의 사회라는 점, 대체로 아버지가 가장이라는 점, 논밭이 많다는 점, 소는 키우지만 양은 거의 키우지 않는다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돼지도 키우느냐고 물으셨다. 키운다고, 그리고 먹기 위해 키운다고 답하자 아주머니와 친구분은 질겁을 하셨다. 곧이어 내 종교를 물으셨고, 기독교라고 답하자 갑자기 이슬람교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슬람교도가 되었음을 시인하는 기도문을 따라 읊게 하셨다. 친구분은 내가 그 기도문을 읊고 이슬람교도가 되면, 알라에게 돌아온 나도 복을 받고, 내 회심에 일조한 아주머니 역시 복을 받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제야 사람들이 나를 경계하고 피했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를 겁주어 쫓아내기 위해서 뿌린 건지, 이교도인 나의 부정함을 씻어내기 위해 뿌린 건지 그 피의 의미는 끝내 알지 못했다. 그러나 확실한 건 나는 이방인이자 ‘이교도’였다. 그들은 이미 TV를 통해 동방의 사람들은 돼지를 먹고, 알라를 믿지 않는 이교도라는 이미지를 알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 이교도가 마을에 나타나자, 말이 돌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친구분이 용기를 내어 돼지를 키우느냐고 물어본 것이었다. 불결한 이교도를 받아들이기에는, 이 마을은 너무나 독실했다. 나는 아주머니께 정중히 거절의 뜻을 전하며 내 입장을 설명했다.
“저는 아주머니의 깊은 신앙심을 존중해요. 아주머니께서도 제가 어려서부터 지켜온 신앙을 존중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제 종교와 문화에서 비롯된 차이들이 마을 분들께는 걱정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제가 마을에 가져온 음식은 모두 시내 마트에서 산 것들이에요. 팬케이크 가루, 체리주스, 초코잼, 파스타면이 전부예요.”
나는 마을 사람들이 염려하는 ‘이교도적’ 음식이나 행동은 전혀 없다고 덧붙이며 안심시켰다. 아주머니는 알겠다며 웃으시더니,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차가 식었다며 새로 내어주셨다.
그 뒤로는 집 밖에 나설 때, 마을 아주머니께 선물 받은 바지를 입고 다녔다. 샬바르(Şalvar)라는 바지로, 튀르키예와 중앙아시아 지역의 민속 의상이다. 통이 넓고 발목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로, 우리나라의 몸빼바지와 닮아 있었다. 샬바르를 입고 아랫마을과 윗마을을 쏘다녔고, 옥수수밭에서 트랙터도 몰고 양을 치러 가기도 했다. 나를 본 마을 사람들은 “저 아이 좀 봐라”며, 샬바르가 제법 잘 어울린다며 웃었다.
그 이후 사람들의 호칭이 조금씩 달라졌다. “너” 혹은 그냥 이름인 네르기스라고 부르던 분들이, 어느새 “크즘(kızım)”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크즈(Kız)는 딸이라는 뜻으로, 직역하면 ‘내 딸아’라는 의미다. 동시에 소녀라는 뜻도 있어, 어른들이 어린 여자아이를 부를 때 흔히 쓰는 호칭이기도 하다. 작은 호칭의 변화였지만, 관계는 분명 달라지고 있었다. 호의를 넘어 애정을 담아 대해주시는 분들께, 나 역시 더 서스럼없이 살갑게 굴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나를 더욱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조사가 끝나고 마을을 떠날 무렵, 많은 분들이 눈시울을 붉히셨다. 도시로 돌아가면 이 작은 산촌 마을을 잊을 거라며 섭섭해하셨다. 나 역시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스탄불로 돌아온 뒤에도 우리는 종종 통화를 했고, 영상통화로 일상을 나누기도 했다.
겨울방학이 되어 친구와 함께 다시 마을을 찾았다. 카흐베에 들어서자 아저씨들이 “우리 애가 왔어!(Kızımız geldi)”라며 나를 안아주셨다. 어떻게 왔는지, 또 조사를 하러 온 건지 물으셨다. 그냥 마을이 그리워서 왔다고 하자, 모두 함박웃음을 지으며 원하는 만큼 있다 가라고 하셨다. 집집마다 전화해 내가 왔다는 소식도 전하셨다.
마을길을 따라 내려가니 아주머니들이 길까지 나와서 나를 안아주며 앞다투어 집으로 초대하셨다. 집집마다 인사를 다니며 선물을 드렸고, 3박 4일 동안 열다섯 끼는 먹은 것 같았다. 이스탄불로 떠나는 날, 다시 한 번 눈물바다가 되었지만 또 오겠다고 약속했다.
가장 최근에는 한국에 돌아오기 직전, 마을 결혼식에 다녀왔다. 조사를 하러 갔던 당시 중학생이던 아이가 자라 결혼 소식을 전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각별했던 집이라, 망설임 없이 마을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은 마을은 여전히 정겨웠다. 신부의 부모님은 바쁜 애가 어떻게 왔느냐며 타박하셨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어떻게 보면 서로 다른 두 문화가 만나고 이해하기까지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 같다. 마냥 매일 친절하고 그저 포용해주었다면 깊이 있는 관계를 못 맺었을지도 모른다. 두 문화가 충돌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관계가 피어났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조사 배경이 된 마을에서 깊은 교감을 한 나의 작은 산촌 마을 소유트알란.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들도 기대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