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굴양 Jan 12. 2021

[브런치 모래알 프로젝트] 우리는, 보통 사람

너굴양 북리뷰ㅣ박완서 에세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결혼정보업체에서는 해마다 ‘이상적인 배우자 조건’이라는 걸 발표한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해 어느정도의 연봉을 받고, 재산은 어느정도 모은, 키와 몸무게는 또 어느정도 되는 그런 남녀가 반듯한 옷을 입고 서 있다. 소셜에 떠도는 이미지를 보고 남편과 한참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서로가 아니면 결혼하지 못했을거야.”


결혼하지 않으려던 때도 있었다. 삼십대 초반,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고 작가가 되겠답시고 이런저런 프리랜서 일을 하며 떠돌았다. 몇 년을 그렇게 살다보니 결혼이고 아기고 다 남의 일이었다. 엄마는 내가 “나 결혼 안해”하면 “그래 엄마랑 같이 살아”하며 웃어넘겼다. 한참 일할 나이에 돈도 모으지 못하고 건강을 잃을뻔 했던 일 때문인지 엄마의 ‘같이 살자’는 말은 어느새 진심이 되었다. 엄마는 어떤 남자가 사위가 되기를 원했을까? 딸과는 다르게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는 ‘보통 사람’을 바랐을까?


결혼에도 관심이 없고 연애나 하며 허송세월하는 것 같던 과년한 딸이 갑자기 결혼을 하겠답시고 허여멀건한 남자를 데려왔을 때, 엄마 아빠는 말은 안했어도 꽤나 안심한 눈치였다. 하지만 남편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고(남편 너마저!) 에세이 책을 세 권 줄줄이 내며 작가가 되었다. 나와는 달리 빨리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제주 구도심의 오래된 빌라를 연세로 빌려 신혼집을 삼고, 결혼식만 서울에서 번듯하게 했다. 예단이고 예물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봄에 가려던 신혼여행은 아기가 생겨 미뤘다. 결혼에서의 ‘보통’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안에서 살기로 했다. 내가 나고 자란 대도시의 기준만큼 빡빡하지 않아서였을까? 우리는 제주에서 행복했고, 갓난아기를 기르기 위해 서울에 돌아오기로 했을 때도 우리 방식대로 느슨하게 살자고 다짐했었다.


뱃속에서 하이킥하던 아기는 이제 온 집안을 걸어다닌다. 그 사이 우리는 아기를 키우기 좋은 환경으로 이사를했고, 집에서 일하며 함께 육아를 한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를 많이 한다지만, 우리는 결혼 하고 2년 넘게 24시간을 붙어있으며 일도 하고 아기도 키웠다. 부부가 공동육아를 하니 이마저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보통이 아닌 모양새가 되었다. (얼마전에는 인터뷰도 했다. 이게 뭐라고)


그간 남들보기에 별나보이는 일, 유난스러워 보이는 일도 많이 하고 살았다. 하지만 나도 남편도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조금 더 행복하려고 매일 애쓴 것뿐이다. 그리하여 별 일 없는 하루, 보통의 하루를 보내기 위해.


박완서 에세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박완서, 세계사)>







<작업 후기>


곧 박완서 선생의 에세이집이 나오는데 읽고 컨텐츠를 만들어 줄 수 있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신간을 미리 받아 읽을 수 있다니, 그리고 무려 박완서 선생이 아닌가! 책, 어서 보내주십시오. 제가 한 번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처음 읽었던 때, 나는 우연히도 책에 나오는 현저동 언덕에 살고 있었다. 독립문 사거리, 일제강점기에 수 많은 독립열사들이 숨져간 형무소 앞 판자촌이 있던 자리다. 형무소는 역사관이 되고, 판자촌과 옥바라지 골목에는 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책보를 메고 인왕산을 걸어 학교에 가던 이야기를 따뜻한 아파트 방구석에 누워 읽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아기를 재우고 하루를 마치기 전에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으며 정말 행복했다. 매서운 겨울이 오기 전에는 유아차를 끌고 나가 아기를 재우고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펼쳤다. 짧게는 삼십분, 길게는 한 시간, 동네 카페에서 사온 따뜻한 라떼까지 있으면 사치가 따로 없었다. 아기를 낳아 기르는 일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는 책에서 멀어져있었다. 그러다 조금씩 몸과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나는 다시 책을 찾았다. 잠깐이라도 책을 펼쳐 활자를 읽을 수 있는 여유는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잃어버렸던 행복을 찾은 듯 했다.


아기를 재우고 밀린 작업을 하는 밤에는 아이들을 재우고 글을 썼던 그녀를 떠올렸다. 하루종일 아이들과 씨름하고 집안을 건사하다 겨우 시간을 내어 앉으면 피로가 밀물처럼 닥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리를 지켰고, 글을 썼을 것이다. 누워서 티비를 봐도 될텐데, 밀린 잠을 좀 더 잤어도 될텐데, 그녀는 글을 썼다. 쓰고, 또 써서 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현역이었다.


마흔에 데뷔한 것 보다, 끝까지 현역작가였다는 것이 부러웠다. 언제 어느자리에서 글을 써도 공감 받고 읽히는 글을 쓰는 그 저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아기를 낳고 일년 동안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작업 외에는 거의 하지 않았다. 야심차게 하리라 마음먹었던 육아일기는 아기 사진을 설명하는 용도였고, 육아만화도 아기가 기어다니기 시작하면서는 체력이 달려 도저히 그릴 수가 없었다.


책을 읽을 체력은 돌아왔지만 작업할 여유는 없던 때에 이 책이 나에게 왔다. 여러 책을 대하다보면 책에도 타이밍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책은 내가 필요한 때에 맞춰서 나에게 온다. 이 책은 그런책이다. 나에게 다시 한 번 책상 앞에 앉을 힘을 주는 책.


나에게 주어진 조용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을때 다시 한 번 꺼내어 곱씹고 싶다. 그렇게 내가 붙잡은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도록. 잊혀지지 않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한 번 더 들여다본다.





박완서 작가 10주기 에세이집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박완서, 세계사, 2020)>의 ‘보통 사람’을 읽고 쓰고 그린 컨텐츠입니다.



 #브런치모래알프로젝트 #모래알만한진실이라도

작가의 이전글 <오늘도 아무 생각 없이 페달을 밟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