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아직, 여기 계신다

가시를 삼킨 말(2021.12.02. 일기)

by 네로

2021.12.02. 일기

할머니의 몸에서 항생제 내성균이 나왔다.
지금 입원해 있는 병원에는 격리병동이 따로 없어서 더는 머물 수 없다고 했다.

다른 환자에게 전염될 수 있는 만큼, 즉시 격리병동이 있는 병원으로 전원을 해야 했다.
병원 진료협력센터에서 이송 가능한 병원 몇 곳을 안내받았고, 나는 그중 한 곳을 선택했다.
혹시 할머니께서 다시 깨어나실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격리 중에도 재활이 가능한 병원으로 골랐다.

지인을 통해 연결된 변호사와 짧은 상담도 받았다.
가해자의 100% 과실로 판정된 사고였지만, 할머니께서 평소 아스피린을 복용하셨다는 이유로 '기왕증'이 적용되어, 최대 50%까지 과실이 인정될 수 있다는 말에 절망했다.

회사에선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대학생 때도 하지 않던 실수들을 반복했다.
DNA를 추출하다가 용액 순서를 헷갈렸고, 유기용매를 후드 밖에서 열었다가 눈물, 콧물이 터져 나왔다.
질소가스를 교체하다가 넘어뜨릴 뻔했고, 막자사발에 액체질소를 담다가 그걸 내 쪽으로 쏟을 뻔하기도 했다.

끝내야 하는 결과 보고서도 기한을 넘기게 되어서 결국 연구사님께 불려 갔다.
옥상에는 수많은 후드 환풍구가 돌아가고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1시간 동안 혼이 났다.
"개인적인 일은 집에 두고, 이곳에 와서는 연구에 몰입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그 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가 않았다.


할머니의 수술비와 입원비만으로 1억이 넘는 돈이 들었다.
아버지, 작은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입원 중이었다.
아버지를 뵈러 병원에 갔을 때, 괜찮다고 했던 말과는 달리 온몸이 파랗게 멍들어 있었다.
목은 깁스를 하고 전혀 움직이지 못했지만, 그 와중에도 담배를 피우러 나가셨다.
답답한 마음을 태우는 일은, 결국 다시 담배를 태우는 일이었다.

내가 농촌진흥청으로 출근하는 시간은 매일 아침 7시 50분.
퇴근은 밤 9시 30분 마지막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면 밤 10시.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효자 제7호 어린이공원'이라는 작은 공원이 있다.
가끔 그곳에서는 부모님과 함께 선향폭죽에 불을 붙이는 아이들을 보곤 했다.
어디선가 나는 화약 냄새에 "아이들이 여름을 태우고 있구나" 생각하며 미소 짓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겨울밤엔 아무도 없었다.
내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 말고는, 이 겨울을 녹여줄 존재가 없었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자갈들의 감촉.
저 멀리 큰 길가에서 들려오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
전주에서는 눈이 잘 오지 않기 때문에, 눈이 한 번 내리면 교통이 마비되곤 한다.
또 누군가의 차가 미끄러졌나 보다 싶었을 때, 밥 짓는 냄새가 났다.

작은 원룸 안에서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리던 아내가, 저녁밥을 짓고 있나 보다.


나는 ‘미생물을 연구하는 농업 연구사’가 되고 싶었다.
처음부터 그 길을 꿈꾼 건 아니었다.

2015년, 거제도에서 열린 한국식물병리학회에서 박경석 박사님의 발표를 들은 뒤부터다.
그 발표 이후 나도 그 길을 걷고 싶어졌다.
그래서 대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농업미생물과 면접을 봤고,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바로 근무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스물다섯의 나와 아내는 결혼했고, 서로의 꿈을 응원하며 공부를 이어갔다.
산학연 과정을 통해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전문연구원으로 업적을 쌓고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 ‘돈’이라는 현실적인 벽이 내 발목을 잡았다.

사고 이후 몇 번이나 아내에게 “연구사가 아닌 다른 직업을 알아볼까?”라는 말을 꺼내려했지만, 결국 단 한 번도 말하지 못했다.
중증환자가 된 이후 반쯤 포기한 나보다도, 내가 연구사가 되기를 더 바랐던 사람에게
“그 꿈을 포기하겠다”는 말은, 마치 가시를 삼키는 것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인사를 하고, 씻은 뒤
욕실의 샤워기 부스 안에서 물을 틀어놓고 10분 동안 울었다.

도대체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군 시절부터 이어오던 모든 후원을 중단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이 소중하다는 건 알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부터 챙기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크게 후회할 것 같았다.

병원비가 산처럼 쌓였을 때,
"그때 왜 그 돈이라도 아끼지 않았을까" 자책할 내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의 선택이 조금은 덜 아팠다.

다행히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1:1 후원 아이는 사고 전 이미 만 18세가 되어, 자연스럽게 종료할 수 있었고
장기기증 단체 후원도 큰 죄책감 없이 정리할 수 있었다.
비록 내가 보낸 소액들이 더 이상 필요한 곳에 닿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지만,
그 아픔조차 이젠 조금 내려놓기로 했다.


오늘,
나는 내 꿈을 내려놓았다.

내 꿈은 여전히 머나먼 길 위에 있다.

움켜쥘 수도, 닿을 수도 없다.
하지만 지금,
할머니는 아직, 여기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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