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스무 번째 봄, 4월 3일

성인, 그리고 고정관념과 울타리에 대하여

by 네로

규담아,

스무 살이 되었구나. 이제 정말 성인이야. ‘성인’이라는 단어가 아직은 너무 낯설고 무겁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규담이의 인생은 이제 정말로 규담이의 것이 되었단다. 아빠가 해줄 수 있는 말들은 조금씩 줄어들겠지만, 그만큼 네가 직접 만들어갈 이야기들이 많아질 거야.


아빠는 20살이 되던 해, 너의 엄마와 처음으로 술집에 갔단다. 1월 1일이 되는 자정 무렵, 사람이 북적이는 그곳에서 말이야. 사람들 틈에 섞여 있다는 것이, 왠지 ‘어른이 된 기분’을 실감하게 했던 기억이 나. 하지만 아빠는 규담이가 술을 많이 마셨으면 하진 않아. 아빠가 하는 일 중에는 물에 잘 녹지 않는 물질을 유기용매나 알코올에 녹이는 작업도 있어. 그런 건 몸에 좋지 않은 것들이지.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혼자 술에 녹이며 삼키지 않았으면 좋겠어. 대신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과 감정을 나누기를 바란단다.


아빠는 어릴 적, 자주 할머니나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단다. 솔직히 말하면, 아빠에게 어머니(그러니까 너의 할머니)는 무서운 존재였어. 이유도 잘 기억나지 않는 일로 종종 회초리를 맞았고, 그 회초리는 부러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지. 너무 맞는 게 싫어서 몰래 회초리를 아궁이에 태워버린 적도 있어. 한겨울에 맨발로 집 밖으로 쫓겨났던 날보다, 매를 맞고 난 뒤 상처 부위에 된장을 발라주시던 그 기억이 더 싫었어.


그때는 정말 무서운 존재였던 어머니가 지금은 너무 작고 여린 사람으로 느껴진단다. 규담이에겐 엄마라는 존재가, 아빠의 기억과는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


그리고, 규담이도 곧 군대에 가겠지. 아빠처럼 소방서에서 근무하긴 어렵겠지만, 그 시간조차 규담이를 성장시켜줄 거라고 믿어. 노파심이지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군대에서는 눈에 띄지 말고, 평범하게 지내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거기선 눈에 띄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거든.

아빠는 2014년 8월 10일, 소방서에서 근무하던 중 “UFO가 나타났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적도 있었단다. 지금은 웃긴 추억이지만, 그땐 진지했지.


규담이가 해줄 이야기들도 참 많을 텐데, 아빠는 그걸 아직 듣지 못해 아쉬워.

규담이가 어른이 되었으니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아빠가 군 복무를 하던 시절, 소방서에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단다. 그 중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어. 아주 잘 차려입은, 브랜드 옷과 선글라스 그리고 고가의 가방을 든 여성분이었어. 아빠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에르메스 버킨백은 그때 딱 한번 말고는 본적이 없어. 또 그분의 자세나 말투에서는 부유한 삶이 느껴졌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사모님”이라고 하면 딱 떠오를 만한 모습이었어. 처음엔 그저 위자료를 많이 받기 위해 이혼하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고정관념이었지.


그분은 예전에 가정폭력으로 구급차에 실려 갔고, 신고 당시의 출동기록을 받기 위해 소방서에 왔던 거였어. 처음엔 눈을 잘 마주치지 않아 무례하다고 느꼈는데, 나중에 다시 찾아오셨을 땐 전혀 다른 모습이었단다. 손은 떨리고 있었고, 얼굴에는 옅은 상처 자국이 있었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던 건 무례함이 아니라 두려움이었지. 그 분의 목소리는 메마른 사막처럼, 조용히 떨리고 있었단다.


아빠는 차를 드렸어. 따뜻한 게 위로가 될까 싶어서. 그제서야 보였지. 그 사모님 같던 겉모습 뒤에 숨어 있던, 폭력에 지친 한 사람의 얼굴. 상처는 피부보다 마음에 더 깊이 남아 있었을거야. 그분은 결국 차를 마시지 못했어. 아마 마음이 너무 불안했겠지. 그 분이 떠날 때, 아빠는 속으로 빌었단다. “부디 이제는 행복하실 수 있기를.”


그 일을 계기로 아빠는 울타리라는 것이 얼마나 양면적인지를 깨달았단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외부의 위험을 막아주는 동시에, 그 안에 갇혀버리게도 하지.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집안이, 그 울타리 안에서는 얼마나 버거운 고통이 있었는지 우리는 문을 열어보기 전엔 알 수 없어.


규담아,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지 마. 멀쩡해 보인다고, 웃고 있다고 해서 다 괜찮은 게 아니야. 누군가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차를 타는지가 그 사람의 삶을 말해주지 않아. 어떤 사람은 울타리 안에서 버티고, 견디고, 살아내고 있을지도 몰라.


규담이는 그런 시선을 가진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어. 판단보다는 이해를,

비판보다는 경청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이제, 너의 인생은 정말 너의 것이야.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웃거나 눈물지을 수 있는 순간들이 오겠지. 그렇게 너는 너의 길을 걷게 될 거야.


사랑한다, 내 아들.

사랑을 가득 담아,


봄에,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