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스물일곱 번째 봄, 4월 3일

첫 성공과 첫 고비, 그 너머에 있을 너에게

by 네로

사랑하는 규담아,

스물일곱 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이 편지를 쓰는 아빠는,

지금 너의 모습이 궁금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걱정이 되기도 한단다.


스물일곱 살은,

아직 청춘이라고 말하기엔 세상이 무겁고,

이미 어른이 되어야 할 것 같은 기대가 따라붙는 나이야.

네가 지금 어디에서, 어떤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든

아빠는 무엇보다 네 마음이 지치지 않길 바란다.


아빠가 스물일곱이었을 때를 떠올려보면,

그 시기는 아마 아빠 인생에서

처음으로 세상이 '성공'이라고 불러줄 만한 성과를 거뒀던 시기였던 것 같아.


농촌진흥청에서 산학연으로 근무하면서

밤에는 대학원 수업을 듣고,

짬날 때마다 책을 펴고, 문제집을 들여다보며

농촌지도사와 농업연구사 시험을 준비했단다.

하루하루가 버거웠지만,

결국 농촌지도사 합격이라는 결과를 받았지.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쁨은

지금도 마음 한편에 따뜻하게 남아있어.

그 순간만큼은

“내가 정말 열심히 살아왔구나.

그 시간이 헛된 게 아니었구나.”

하는 확신을 가졌단다.


그런데 그 합격이

순수한 기쁨으로만 남지는 않았어.

세상은 늘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하거든.


아빠는 합격 사실이전에

응급실에 두 번이나 실려갔었단다.

한 번은 병원에서 내시경과, 조직검사, 피검사를 마치고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위암입니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지.


그 당시 주변에서는(아빠는 나름 인간관계가 좋았단다.) 이런 말을 자주 했단다.

“어떻게든 합격해.

그다음은 다 방법이 있어.

사기라도 쳐서 들어가면 그게 이기는 거야.”


그 말을 들었을 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무겁고 불편했단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신체검사에서 색맹임에도 불구하고,

색맹용 렌즈를 끼고 정상 판정을 받은 후

농업연구사로 최종 합격했지.

그런데 나중에 그 사실을 동료에게 말했고,

그 동료가 내부고발을 하면서 결국 퇴사하게 됐단다.


또 어떤 이는 지병이나 장애를 사전에 고지하지 않은 채

임용되었다가, 그것 때문에 공직 생활에

큰 타격을 입은 사례도 있었고 말이야.

그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복잡했단다.

불공정해서가 아니라,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내야 하는 사회구나’ 하는

씁쓸함 때문이었어.

그 정도로 누구나가 절박한 시기였구나라고 절감했지.


그날은 정말이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단다.

엄마는 사색이 되어 울었고,

아빠는 ‘내가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나’ 싶은 마음에

무력감에 빠져서 며칠을 울기만 했어.


그런데도 그 고비를 지나고 나니

또 살아지더라.

사람이란 존재는,

진짜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에도

살아낼 구석이 남아있다는 걸

아빠는 그때 처음 알았어.


규담아,

지금 너는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처음으로 네가 정말 바라는 무언가를 이루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아무리 애써도

되는 일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겠구나.


아빠는 말해주고 싶어.

성공이 전부는 아니라고.

우리가 바라는 삶은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합격'만으로

증명되는 게 아니라고 말이야.


때로는 너무 치열하게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살다 보면,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될 때도 있거든.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자기 자신에게도 떳떳하지 못하게 되는 건

살면서 가장 먼저 지치게 만드는 일이란다.


규담아,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야.

한 번의 합격이 전부가 아니고,

한 번의 실패가 끝도 아니야.

너는 네 길을 걸어가면 돼.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조급해하지 말고,

네가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길을

네 속도로 걸어가면 된단다.


혹시 지금,

너도 뭔가 감추고 싶은 약점이 있거나

드러내기 무서운 상처가 있다면

그걸 무조건 억누르기보다

어떻게 품을지,

어떻게 건강하게 드러낼지 고민해 보렴.


그러면 언젠가

누군가의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


아빠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너를 믿고,

너를 응원하고,

너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단다.


기억해 줘.

아빠가 너에게 주고 싶은 건

‘강요된 성공’이 아니라

‘편안한 마음’이란 걸.


이 편지가 네 마음을

잠시나마 쉬게 해 줄 수 있기를 바라며,


봄에,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