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스물여섯 번째 봄, 4월 3일

떡잎의 사랑에 대하여

by 네로

사랑하는 규담아,

스물여섯 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스물여섯 번째 봄을 맞은 너는 지금 어디서, 어떤 얼굴로 이 편지를 읽고 있을까.

아침 햇살이 살짝 비치는 창가에 앉아 있는지,

아니면 하루를 다 써버리고 지친 저녁,

잠시 눈을 감고 싶은 순간인지.

아빠는 그저, 너의 눈가에 햇살 같은 웃음이 깃들어 있기를 바란다.


아빠는 스물여섯 살에 짧았던 계약직 일을 마치고,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뼈저리게 느끼며

대학원에 들어갔단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길은 아니었어.

회사에서 일하면서 동시에 석사 과정을 병행하는, ‘산학연’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시작한 공부였지.


출근 시간은 오전 9시, 퇴근은 저녁 6시로 정해져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종이 위에 쓰인 숫자였단다.

현실은 달랐지.

야근은 예사였고, 실험이 끝나더라도 공부할 것들(논문)이 산더미라서 퇴근이란 말도 꺼낼 수 없었어.


회사는 나를 학생으로 보았고,

학교는 나를 직장인으로 보았어.

그 어디에도 내가 완전히 속해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단다.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단다.

그 외로움은 생각보다 깊고, 길게 남더구나.


그리고 그때는 지금보다 제도적인 안전망이 부족했어.

실험실 사고로 다치는 일이 드물지 않았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이들도 있었지.

하지만 그런 일을 겪어도, 누구에게 온전히 기대기도 어려웠던 시절이었단다.

산학연을 하다가 지도하던 연구사가 발령이 나거나,

갑자기 연구실의 분위기가 바뀌면,

그 모든 과정이 한순간에 멈춰버릴 수도 있었어.


아빠처럼 경상도에서 대학을 나오고

전라도에서 공부를 이어가던 친구들은 더더욱 선택지가 좁았지.

돌아갈 교수님도, 부탁할 연구실도 없었던 경우가 많았단다.


그래서 규담이가 만약 어느 날,

"아빠, 나 대학원 가고 싶어."라고 말한다면

아빠는 솔직히 말리고 싶다.

물론 공부가 즐거울 수도 있고,

연구가 네 삶의 방향일 수도 있겠지만

아빠는 그곳에서 받은 아픔이 아직도 가끔은 마음을 아리게 하거든.


그렇다고 네 꿈을 꺾으려는 건 절대 아니야.

아빠의 경험이 다가 아니고,

네 길은 또 다를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규담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면,

누구보다 엄마가 널 지지해 줄 거라고 믿는다.


아빠가 고등학생 때 글 쓰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을 때,

엄마는 “그럼 내가 일해서 먹여 살릴게”라고 했지.

지금 생각해 보면 무모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아빠는 그 말에서 진짜 용기를 얻었단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야.

네가 무언가 하고 싶다고 말하면 어떻게든 길을 찾아줄 사람이거든.


열 개를 해줘도 하나 못해주면 슬퍼하는 게 엄마야.

그게 사랑이란다.


그러니까 규담아,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면,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엄마에게, 혹은 너 자신에게 말해보렴.

조금 돌아가도 괜찮아.

다만 그 길이 너의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기를 바란다.

누군가의 기대나 사회의 속도에 밀려 선택한 길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온 방향이기를.


그리고 혹시,

아빠는 이제 너의 곁에 없더라도

이 편지를 통해 너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


규담아,

식물은 처음 싹을 틔울 때

‘떡잎’이라는 특별한 잎을 내밀지.

그건 식물이 세상에 첫걸음을 내딛는 방식이야.

하지만 떡잎은 오래가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광합성 능력도 떨어지고,

잎의 모양도 작아지지.

그럼에도 그 떡잎은,

다음 잎이 자랄 수 있도록

자신의 양분을 내어주는 역할을 해.


토양에 양분이 부족할수록

떡잎은 더욱 빠르게 시들며

그 힘을 다음 세대로 넘겨준단다.


아빠와 엄마가 너에게 그런 존재이길 바란다.

네 삶이 자라나는 데 작은 양분이 되는 떡잎처럼.

빛나지 않아도 좋다.

곁에 오래 남지 못해도 괜찮다.

다만 너라는 생명이

자신의 잎을, 가지를, 줄기를

더 크게, 더 자유롭게 뻗어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만으로 충분해.


그래서 규담아,

미안해하지 마.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해보렴.

시작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시작하렴.

실패하더라도,

너의 떡잎은 그것조차 품고 응원할 테니까.


아빠는 지금 어디에 있든

이 봄날 너의 웃음이 들려올 것만 같아.

너의 발걸음, 너의 고민, 너의 작은 선택들까지

모두 존중하고, 응원해.

네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그게 너답다면,

아빠는 너를 자랑스럽게 여길 거야.


그러니 이 편지를 다 읽고 나면,

잠깐 조용히 눈을 감아보렴.

그리고 다시 너의 삶을 걸어가렴.

늘 그랬듯,

너는 잘하고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너라는 사람은

참 소중하고,

참 사랑스럽단다.


봄에,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