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서른 번째 봄, 4월 3일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하여

by 네로

규담아, 서른 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다시한번 계절은 돌아와서 규담이 네가 어느덧 서른 살이 되었구나.


그거 아니? 우리나라의 1년은 24 절기와 네 계절로 이루어져 있단다.

하지만 아빠는 가끔, 우리에게는 사계절이 아니라 ‘오계절’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

그중 하나는 겨울보다 더 차갑고, 시간이 얼어붙는 계절.

그 계절은 오직 아빠에게만 존재하는, 멈춰버린 시간과 같은 계절이란다.


아빠가 서른 번째 생일이 되는 날, 아빠는 그 계절 한가운데에 서 있었단다.

그때 우리 가족은 큰 시련을 겪었단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 모두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셨지.

경남에서 평생 살아오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셨는데,

그 길 위에서 무면허 운전자가 뒤에서 차량을 들이받았단다.


특히 할머니의 경우는 여러 병원을 전전했고, 골든타임은 이미 지난 뒤였어.

수술은 늦어졌고, 뇌출혈은 심했지.

의사 선생님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라고 말씀하셨고,

의식이 돌아오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단다.

아직도 그 기억은 아빠 마음속에 깊게 새겨져 있어.


그 당시, 아빠는 30살이었고, 보험 문제며 병원 문제, 가해자 처벌 등 아무것도 알지 못했어.

그저 한 가지 바람뿐이었단다.

할머니가 의식을 회복하시길 바랐어.

보내드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사고 후 6시간 동안 병원을 세 곳이나 옮겨 다녔단다.

‘지주막하출혈’이라는 뇌출혈은 위험도가 매우 높았고, 빠르게 수술해도 후유증이 크다는 의사의 말에 아빠 마음은 더욱 무거웠어.

1주일, 2주일, 3주일... 시간이 흘렀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졌단다.

의식 회복 가능성은 10%도 채 안 된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도 들었지.

아빠는 책임을 묻고 싶었지만, 누구 하나 명확히 책임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했어.

가해자는 무면허 운전자였고, 사고는 100% 가해자 잘못임에도 보험사는 아버지에게 겨우 350만 원 합의금을 제시했어.


그뿐 아니라, 가해자로부터 연락 한 통 없었단다.

가족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지만, 보험과 의료 현실은 너무도 냉혹했어.

아빠는 밤새 보험사와 합의가 가지 않도록 정보를 찾아보고, 손해사정사와도 상담했어.

아빠가 ‘암과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다음 카페에서 제일 유명했던 한문철이라는 변호사와 상담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쪽지를 받았단다.

그리고 그 상담에서 소송밖에 가족을 위한 길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지.

온 가족이 병원에 누워 있던 시간.

아버지는 전신에 멍이 들고 목에 깁스를 하셨지만, 힘겹게 담배를 피우셨단다.

그 모든 순간이 아빠 마음을 부서뜨렸어.


그 시절 아빠는 실험실에서 자꾸 실수를 했어.

유기용매를 잘못 다뤄 눈물과 콧물이 멈추지 않았고, 질소가스를 교체하다가 넘어질 뻔하기도 했지.

보고서는 늦어졌고, 연구사님께 혼나는 날이 많아졌단다.

집에 돌아오는 길,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걷는 동안, 어린이공원 앞을 지나며

겨울밤의 쓸쓸함을 온몸으로 느꼈어.

엄마가 혼자 집에서 저녁밥을 짓고 있을 생각에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지만,

그럼에도 하루하루가 버겁기만 했지.

아빠는 그때도 버텼단다.

왜냐하면 할머니가 아직 병원에 계셨고 그 한 줄기 희망이 아빠를 붙잡았으니까.


가끔 아빠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단다.

항암 때문에 힘들었고, 음식을 삼키지 못해 괴로웠고, 머리카락이 빠졌으며, 손발이 너무 차가웠지.

그 모든 시간들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아빠는 그 속에서도 웃고 싶었고, 살아가고 싶었단다.


아빠는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이하고, 12월이 되어서야 병원 옥상에서 바라보았던 절벽 아래를 더 이상 떠올리지 않았단다.

그리고 혹시 누군가가 그 절벽 앞에 혼자 서 있지 않도록, 꼭 붙잡아 주고 싶단다.


네 엄마가 고등학생 때 아빠에게 했던 약속처럼,

아빠도 너에게 약속할게.

살아내는 게 아니라, 웃으며 살아가자고.

그게 우리가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가장 큰 흔적이니까.


규담아,

아빠가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꼭 기억해 주길 바란다.

아빠가 힘든 시간들을 견뎌내면서 너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은 아주 단순하지만 진심이 가득해.

이 세상에 어떤 일이 닥쳐도, 너는 절대 혼자가 아니란다.

가족이란 서로를 붙잡아 주고, 함께 이겨내는 거야.

아빠가 겪은 고통과 슬픔도 결국 너를 위해서, 우리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해.

때로는 세상이 너무 무겁고 버거울 때가 있을 거야.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포기하지 말고, 네 마음속에 언제나 희망의 작은 불씨를 간직하길 바란다.

아빠가 겪었던 절망 속에서도 붙들었던 그 작은 희망처럼 말이야.


무엇보다, 너 자신을 소중히 여기렴.

스스로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란다.

그래야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도, 도울 수도 있어.


규담아,

아빠는 네가 웃으며 건강하게 자라길,

힘든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길 바란다.

언제나 너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게.

사랑해, 내 아들.


봄에,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