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닿을 듯한 것들

by 네로

“돈은? 어떻게 됐어?”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말끝이 책상 모서리처럼 각져 있었다. 상담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겨울의 마른 공기가 커튼을 아주 조금씩 흔들었다. 히터가 내는 바람은 따뜻하다기보다 미지근했고, 벽시계의 초침은 멈춰 있지 않은데도 멈춰 있는 것처럼 느리게 걸렸다. 나는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었지만, 앉아 있다는 감각은 허벅지 끝에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그게... 쉽지가 않네요.”


내 입에서 나온 소리는, 낯선 방에서 길을 잃은 아이처럼 작았다.

선생님은 안경을 벗었다. 안경닦이가 하얀 천인지 회색 천인지, 순간 알 수 없었다. 곧 천 위로 둥근 렌즈가 한 번 반짝였다.


“그래. 요즘 등록금이 장난 아니지. 아르바이트해서 모으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거야.”


그다음에 이어진 말은, 마치 종이에 미리 적어 둔 문장을 읽는 것처럼 똑 떨어졌다.


“게다가 지금 네 성적이라면 갈 수 있는 대학도 한정적이고. 대학을 나와도 뭘 하겠니. 요즘은 다들 그저 그런 대학 졸업장이더라.”


말끝이 내려앉는 순간, 가슴 안쪽에서 얇은 유리가 금 가는 소리가 났다. 말은 차분했고, 표정도 화내지 않았지만, 말 사이에 끼어 있는 뜻은 너무 분명했다—가지 말아라. 손해만 보지 말아라. 네가 손에 쥘 수 있는 건 다른 거다.

“선생님.” 나는 내 목소리를 확인하듯 입을 열었다. “저도 알아요. 이 성적으로 대학을 가도,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거. 그래도 해보고 싶어요.”

내 혀끝의 말들이 한 번 엎질러졌다가 다시 그릇에 담기는 느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분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해 볼 수 있는 데까지, 해 보고 싶어요.”

말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왜 이렇게까지 붙잡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은 문장이 하나 더 있었다. 아버지와의 약속. 아주 오래전, 아버지가 웃으면서 했지만 웃음보다 오래 남은 그 말.


“아빠는 대학을 안 가봐서 어떤 곳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네가 가서 보고 와라. 나중에 네 아들한테 대학이 어떤 곳인지 말해 줄 수 있게.”


그때의 아버지는 장난스럽게 말했다며 내 등을 툭 두드렸는데, 그 말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약속이 되었고, 약속은 목표보다 오래갔다. 나는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동정을 부르는 말은, 말과 동시에 내 마음을 줄이고 내 꿈의 크기를 깎아내릴 것 같았으니까.

선생님은 한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래. 열심히 해.” 어깨를 두 번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 두 번이 위로인지, 작별인지, 그 사이 어디쯤인지 판단이 어렵다. 나는 고개를 숙여 “감사합니다”를 말하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차가운 복도의 공기가 서랍 안의 종이처럼 건조하게 얼굴에 부딪쳤다.


상담실 문을 나서 복도를 걸을 때면, 사람들 말의 온도가 피부로 전해진다. 누군가는 나를 지나치며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는 내 어깨를 툭 치며 힘내라 한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한 이유는 내가 아버지가 없어서일까. 그 생각이 떠오르면, 나는 오른손을 주먹으로 천천히 말아 쥔다. 예전에 아버지가 가르쳐 준 방법이다.


“화나면 한번 꽉 쥐었다가 펴. 한 번 더 생각해져.”


손가락 마디가 닿는 곳에 내 체온이 모인다. 주먹을 풀 때, 손바닥 안쪽으로 피가 다시 흘러들어오며 말한다. 그래, 잘 참았다. 잘 참았다고 말할수록, 참지 못하는 것들이 얼굴을 내민다. 가난이 분하고, 세상이 분하고, 그리고 말하려다 늘 비켜 가는 그 말—어머니 이제는 흐릿한 기억조차 없는데도, 없다는 사실이 또렷해서 괴로운 사람. 내 안에 남아 있는 형체 없는 사람을 타인의 혀로 규정당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복도를 끝까지 걸어 내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바깥공기가 얇은 칼날처럼 뺨을 스쳤다. 올해의 눈은 늘 눈이 되지 못하고, 진눈깨비로 땅에 닿자마자 물이 되었다. 운동장 모래알 위에 내려앉는 하얀 점들이 흡수되듯 사라졌다. 바람은 종이처럼 마르고, 하늘은 금속처럼 차갑다. 나는 잠깐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보았다. 눈인지 비인지 모를 것이 내 눈꺼풀 위에서 금세 사라지고, 따뜻한 것이 눈가에 고일 듯 말 듯했다.


작년 겨울이 몸속에서 되살아났다. 그 겨울,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화물 트럭 기사였고,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었다. 밤에 떠나 새벽에 돌아오고, 새벽에 떠나 밤에 돌아왔다. 운전은 길다. 길수록 사람은 잠깐씩 사라지는 법이다. 졸음이 사람을 반쯤 들고 가다가 놓아 버리듯, 그날 사고가 났다. 사고를 일으킨 사람은 아버지. 졸음운전을 하는 트레일러 차량을 막아서다가 사고가 났다고 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버지는 조용히 발치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석 달 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병실의 꽃병이 두 번 바뀌고, 계절이 한 번 넘어갔다. 나는 그 시간의 길이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병실의 시계는 늘 움직였고, 병원 앞 분식집의 국물은 늘 뜨거웠고, 아버지의 손등에는 늘 바늘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의사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슬픈 문장일수록 발음은 정확하고, 문장 끝은 조용하다.


그 이후로 내 안의 계절은 영영 겨울인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봄과 여름이 순서대로 찾아오는데, 내 옆에만 바람이 멈춰 있는 듯했다. 그 멈춤 속에서 나는 대학을 생각했다. 정말 가야 하는지, 갈 수 있는지, 어느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저녁마다 책상에 앉아 문제집을 펴다가도, 어느 순간 손이 멈추었다. 그러다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네가 가서 보고 와라.” 그 말은 빚이었다. 지우고 싶은 빚이 아니라, 갚고 싶은 빚. 나는 그 빚을 갚고 싶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시내로 나갔다. 교문을 나와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내렸다가 다시 한 정거장을 걸었다. 전봇대에는 늘 전단지가 붙어있다. 그리고 전단지는 늘 누군가의 시간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