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눈

by 네로

봄이 오기 직전, 눈이 내렸다. 하늘은 깊게 맑았고, 바람은 희미한 온기를 품은 채 느릿하게 골목을 스쳤다. 하지만 그 평온한 하늘 아래, 눈송이는 이유도 모른 채 조용히 떨어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부딪혀 은빛으로 반짝이는 눈송이들.


손바닥을 펼치면 미처 닿기도 전에 녹아 스며드는 그 작은 결정들. 내려앉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모두가 눈 깜짝할 새 일어나는 순간들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오래 바라보았다. 떨어지는 눈송이의 속도가 느려질 만큼, 주변의 소리들이 멀어지고 숨결만 또렷해지는 시간.


그때, 바람에 실려오는 듯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 송아지는 눈으로 만든 거라서, 봄이 되니까 녹은 거야.”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엔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시간, 사람, 마음, 계절... 모두 언젠가 손에서 흘러내린다. 알면서도, 이상하게도 붙잡고 싶은 것들은 늘 마음속에 남는다.


뒤에서 느릿한 발걸음이 다가왔다. 할아버지가 외양간 문턱에 서서 한참이나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 속에는 오랜 세월을 견딘 사람만이 가진 무게가 담겨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깊게 파인 주름, 햇볕에 그을린 얼굴, 눈가에 맺힌 온기와 쓸쓸함.


“비어 있는 것도 때론 필요해.”

할아버지는 마치 스스로를 위로하듯 낮게 덧붙였다.


“새로 채우려면, 자리가 있어야 하거든.”


그 말은 내 안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무언가를 잃은 자리에서 우리는 또 다른 것을 살아낸다. 비워진 만큼, 채울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며칠 뒤, 대학본부가 있는 은행에 갔다. 등록금 고지서를 쥔 손에 땀이 배어들었다. 얇디얇은 종이 한 장, 그러나 그 위에 겹겹이 쌓인 세월과 마음은 어깨를 묵직하게 눌렀다. 직원이 도장을 찍으며 말했다.


“수납 완료되셨어요.”


짧은 문장이었지만 내 안에서는 그 울림이 길게 이어졌다. 은행을 나서는 순간, 늦겨울 햇살이 눈꺼풀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내 삶이 조금씩 다음 계절로 옮겨가고 있다는 걸.


중고서점에서 전공책을 샀다. 손때 묻은 책 등, 바래버린 표지, 넘길 때마다 스며 나오는 묵은 종이 냄새. 페이지 사이사이에는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연필로 그어진 밑줄, 작은 낙서, 그리고 희미하게 지워진 이름 옆에 적힌 한 문장.


“절대 포기하지 말 것.”


단 세 글자였지만 그것은 과거의 누군가가 시간을 건너 내게 보내는 편지 같았다. 책을 가방에 넣자

손끝에 전해지는 무게가 조금 더 묵직해졌다. 기대어도 될 무언가가 생긴 것 같았다.


저녁 무렵, 동네 하천가를 걸었다. 녹지 않은 얼음 틈으로 봄눈이 사각거리며 떨어졌다. 작은 눈송이들이 물에 닿을 때마다 얇은 파문이 일었다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결은 제 흐름을 되찾았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장면을 오래 바라봤다. 손을 주머니에서 꺼내 아버지가 가르쳐준 대로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손끝까지 몰린 피가 다시 퍼져나가는 감각 속에서 나는 속삭였다.


“정말로, 잘 참았다.”


그날 밤, 아버지를 꿈에서 만났다. 눈으로 만든 송아지들이 초원의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아버지는 그 사이를 묵묵히 걷고 있었다. 나는 달려가 아버지의 손을 붙잡았다.


“아아, 내 아들아. 사내가 이런 일로 우는 게 아니다.”


장난스러우면서도 누구보다 따뜻한 목소리. 그리고 서서히 멀어지던 마지막 한마디.


“이제 나를 잊어라. 네 삶을 살아라.”


나는 끝내 그 말을 따르지 못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잊지 않되, 붙들려 있지는 않기로.


아침 햇살이 부엌 창문으로 길게 흘러들었다. 국을 데우고 김치로 입맛을 돋우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습관을 따라 나도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온기 속에서 나는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나는 조용히 스스로에게 말했다.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녹아 사라진 자리마다 새로운 온기가 깃들 거라고. 비록 눈으로 만든 소처럼 소중한 무언가가 언젠가 사라질 날이 오더라도 나는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이를 품게 된다면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세상은 예쁘고, 삶은 이렇게나 아름답단다.” 하고


-눈으로 만든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