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눈이 내리던 날

by 네로

겨울밤의 도로는 얼음장처럼 얇게 굳어 있었다.

아스팔트 위로 가로등이 떨어뜨린 빛이 길게 늘어졌고, 그 사이사이에 갓 내린 눈발이 가벼운 흰 점으로 박혔다. 나는 2차선을 따라 묵직한 화물트럭을 몰고 있었다. 히터는 미지근한 숨을 내쉬었고, 라디오는 멀리서 잡히는 주파수처럼 간헐적으로만 들려왔다. 하루 종일 운전대와 씨름한 탓에 어깨가 돌처럼 굳었고, 장갑 속 손바닥은 땀과 추위 사이에서 미묘하게 젖어 있었다.


그때였다.

1차선으로 내 옆을 스쳐 가던 거대한 트랙터-트레일러가 시야에 들어왔다. 차체가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불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두 번의 요동이 아니라, 졸음이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나오는 그 무심하고 둔한 파동. 헤드라이트가 반사판을 때릴 때마다 트레일러 옆면의 리벳들이 번쩍였다. 운전석 쪽을 힐끗 보니, 기사 모자가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고개가 서서히 푹— 떨어졌다가 간신히 돌아오는 모양새였다.


내비게이션 화면에 붉은 선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진천 IC까지 3km”

그 아래, 굵은 글씨로 정체 구간이라는 경고가 번쩍거렸다. 프런트 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전방 200미터 언저리부터 붉은 브레이크등이 주검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 시속 90. 트레일러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스티어링을 움켜쥐고 경적을 길게 눌렀다.

빵—! 빵—!

트럭의 에어혼이 겨울밤을 가르며 울부짖었지만, 1차선의 거인은 꿈에서 깨지 않았다. 헤드라이트를 연속으로 번쩍이며 합도 했다. 차창 틀 사이로 밀려든 찬 공기가 눈을 시리게 했다.

“저러다 그대로 들이받는다.” 심장이 한 번 훅 내려앉았다. 3차선은 갓길과 구분이 흐려질 만큼 차량으로 가득했고, 1차선 바깥쪽에는 방호울타리가 빽빽했다. 피할 길이 없었다.


좌측 대시보드, 속도계 너머로 붙여 둔 사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겨울 공원, 목도리를 두르고 눈을 잔뜩 움켜쥔 열여덟 살 아이가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볼은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있었고, 입가에는 치아가 엿보이는 허술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빠, 봐!’ 하는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서 살아나는 듯했다.


“미안해...”

입술이 거의 들리지 않게 움직였다.


그리고 나는 엑셀에서 발을 뗐다.

엔진브레이크와 리타더를 동시에 걸어 RPM을 눌러 내리며, 2차선에서 1차선으로 살짝 파고들었다. 타이어가 노면의 미세한 얼음막 위에서 미끄러지며 끼-잇소리를 냈다. ABS가 작동해 페달이 발바닥 아래서 잔떨림으로 속삭였다. 왼쪽 사이드미러에는 방호울타리가, 오른쪽에는 트레일러의 거대한 앞바퀴가 어둠 속 동공처럼 자리했다. 나는 자신의 범퍼를 의도적으로 그 앞바퀴 라인에 겹치도록 밀어 넣었다. 강제로 궤도를 틀어 주는, 위험하지만 유일한 방법이었다.


에어혼을 다시 길게 울리며 상향등을 두어 번 터뜨렸다. 그 순간, 트레일러의 운전석에서 남자 몸통이 화들짝 들썩였다. 그러나 속도는 여전히 무자비했다. 나는 브레이크에 온몸을 맡겼다. 치이익— 에어브레이크의 기압이 빠지는 소리가 운전석 발치에서 올라왔다. 안전벨트가 어깨를 사납게 끌어당겼다. 오른쪽 범퍼가 트레일러의 라이트 하우징을 긁으며 불꽃을 뿜었다. 냄새가 났다. 뜨겁게 달군 쇠와 패드의 탄 냄새, 겨울밤 공기 속에 섞여 있는 살짝 금속성의 비릿함.


쾅—!

강철이 강철을 밀어붙이는 둔탁한 충격음.

앞유리 가장자리가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잔 파편이 은가루처럼 눈앞에서 번쩍였다. 운전석이 한 번 들렸다가, 무게중심이 다시 아래로 주저앉았다. 벨트에 눌린 흉골이 욱신거렸다. 도로 위로 타이어 자국이 검게 길게 칠해졌다. 오른쪽으로 밀리던 트레일러의 코가 비스듬히 꺾이며 마침내 전방 브레이크등의 줄 앞에서 철컥— 하고 멈춰 섰다. 순간, 모든 소리가 꺼졌다.


남은 것은 숨소리뿐이었다.

라디오의 희미한 잡음, 히터의 낮은 바람 소리, 어디선가 멀리서 접근하는 사이렌의 꼬리. 붉은 브레이크등 수십 개가 겨울밤에 등불처럼 떠 있었고, 나는 그 빛을 잠깐 바라보다 시선을 떨어뜨렸다. 대시보드의 작은 사진이 흔들림 속에서도 또렷했다. 아이의 웃는 얼굴. 그 웃음이, 어쩐지 눈물처럼 보였다.


손등이 저리도록 핸들을 쥔 힘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어깨에 먹먹한 통증이 몰려왔다. 허공에서 시간의 속도가 느려졌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때, 마음속에서 오래 잠겨 있던 문 하나가 아주 조용히 열렸다. 바람 한 줄기가 그 안에서 흘러나왔다. 오래된 집의 냄새, 교실의 햇빛, 마른 분필 가루, 누군가의 웃음과 달리던 발소리. 기억의 입자가 불빛으로 떠다녔다.


그날은 그렇게 다가왔다. 한 편의 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이나, 맛있는 밥. 넓은 방. 예쁜 꽃들이 잔뜩 피어있는 곳. 하지만 이것들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것이다. 안 그럼 그런 쓸쓸해 보이는 얼굴 할리가 없으니까.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웃어주었다. 그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나를 좋아해 주었기 때문에, 그녀의 기분이 비쳐 보인다. 먼 과거의 이야기다. 전부 눈에 흘려보내자.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먼 옛날 알고 있던 상냥함. 그런 것 이제 나는 모를 텐데 그런데도 그립다고 느끼고 있었다. 조금 전 까지도 바로 근처에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먼 옛날의 꿈. 잠시동안 천장을 보며 그 기억을 더듬어 본다. 생각나지 않아 단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은 그런 감각만이 남아 있었다.


기억은 물처럼 흘렀다.

추억과 추억 사이사이에 눈발이 스며들었다.

그 문장이 끝날 즈음, 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뒤로 기대었다. 앞유리 넘어, 브레이크등의 붉음이 어릴 적 설날에 보던 연등처럼 흔들렸다. 의식의 가장자리로 누군가의 발소리와 무전기의 지직거림, 문을 여는 금속음이 스며들었다. 차 문이 바깥에서 세차게 두드려졌다.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물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멀었다.


“기사님! 괜찮으세요? 눈 좀 떠보세요!”


나는 대답 대신 작은 액자에 손을 뻗었다. 손끝이 사진의 모서리를 살짝 스쳤다. 아이의 볼에 묻었던 눈송이가, 사진 속에서 아직도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반짝임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어둠 속에서 작은 등불처럼.


시간이 한 번 더 느려졌다.

또 한 번, 오래된 문의 경첩이 울렸다. 이번에는 더 안쪽, 더 먼 곳의 문이었다. 그 문 너머에 첫눈이 내리던 아침의 교실이 있었다. 흰 분필가루가 창가를 돌아 내려앉던 빛의 각도와, 누군가의 웃음이 얼마나 가벼운지까지 선명한— 오래된 기억의 입구였다.


그때, 기억이 열렸다.

첫눈이 내리던 아침의 교실, 햇빛에 반짝이던 분필 가루, 그녀의 웃음소리.

모든 게 눈발처럼 천천히 스며들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문턱을 조용히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