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던 아침이었다.
교실 창틀에 내려앉은 눈송이들이, 아주 미세하게 숨을 쉬듯 들었다 났다 했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 희미한 김이 오르고, 분필 가루는 햇빛의 기울기에 따라 반짝이며 떠다녔다. 종이 넘기는 소리, 책상 아래로 흘러내리는 목도리의 털실, 누군가의 기침 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그 모든 사소한 것들 한가운데, 나는 창가 넷째 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교과서의 문제 번호를 펴놓았지만 눈길은 자꾸만 앞줄로 흘렀다.
그녀가 있었다.
앞줄 창가 두 번째 자리. 빛이 머리칼 끝에 매달려 반짝이는 자리. 그녀는 공책을 약간 기울여 놓고, 연필을 잡은 손목으로 짧고 분명한 선을 긋는 버릇이 있었다. 옆자리 친구와 몇 마디를 속삭이다가, 다시 눈을 숙이면 긴 속눈썹이 파문처럼 떨렸다. 연필 끝에서 나는 소리가 이상하게도 분필 긁는 소리와 섞여 다른 리듬을 만들었다. 그 리듬이 교실의 공기를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옮겨 앉혔다.
나는 평범했다.
평균이라는 단어로도 남거나 모자라지 않는, 그런 아이. 늘 비슷하게 찍히는 점수, 이름표의 마른 글씨,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면 금세 잊히는 얼굴. 그런데 마음은 그 수치의 바깥에서 늘 술렁거렸다. 누군가를 바라볼 때, 이렇게 많은 감각이 한꺼번에 깨어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심장은 북처럼 원을 그리며 울리다가, 어느 순간 박자를 계속 놓쳤다. 연필은 이유도 없이 사탕처럼 손바닥에 눌렸다가 미끄러졌다.
수학 시간 종이 다시 울리고, 선생님은 칠판을 닦고 나가셨다.
칠판의 녹색과 분필의 흰색이 선명하게 부딪힐 때, 나는 한참이나 숫자를 바라봤다. 숫자를 따라가다가 중간에서 멈췄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글자를 더듬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태라기보다, 머릿속 어딘가가 잠깐 텅 비어버린 상태. 그때 아주 작은 용기가 속삭였다. 지금이야. 지금이라면.
나는 교과서를 들고 일어섰다. 오른손 검지로 문제 번호를 접어 표시하고, 앞줄로 조심스레 걸어갔다. 걸음마다 바지 주머니에서 동전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돌아가자’는 마음과 ‘한 걸음 더’라는 마음이 교대로 발목을 잡았다 놓았다. 결국 그녀 자리 앞에 멈춰 섰다.
“저... 이 문제 좀, 알려줄래?”
말문이 겨우 열렸다. 내 목소리인데, 내 것이 아닌 듯 얇게 떨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잠깐 나를 통과했다가 다시 교과서로 가라앉았다. 그녀의 손끝이 문제 위를 스치자 흑연이 종이에 미끄러지는 소리가 잔잔하게 났다. 조금의 침묵, 그리고 아주 짧은 웃음.
“여긴 조건을 잘못 읽었어. 여기서부터가 ‘모든’이 아니라 ‘일부’라서... 이 부분을 빼고 생각해야 돼.”
그녀는 연필을 들어 간단한 그림을 그렸다. 쓸데없이 복잡한 기호 대신, 겹쳐진 두 원과 작은 화살표. 설명은 빠르지 않았고, 무엇보다 친절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필 끝이 그어가는 길을 따라가려 애썼다. 이상하게도 문장보다 먼저 전해지는 건 그녀 가까이의 온기였다. 문득 새어 나오는 샴푸 향, 손목에 닿았다 미끄러지는 머리칼 한 올, 연필을 쥔 손가락 마디의 작은 흉터—어느 운동회에서 넘어졌던 걸까.
“이해됐어?”
그녀가 묻자 나는 너무 빠르게,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응.”
그녀의 미간이 아주 살짝 오므라들었다가, 다시 천천히 같은 설명을 반복했다. 이번에는 말보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타이밍, 말끝이 살짝 올라가며 생기는 얇은 미소가 더 선명했다. 나는 이해하려는 표정과 웃음을 참는 표정을 번갈아 붙이며, 스스로도 놀랄 만큼 정확히 마지막 문장을 따라가며 답을 적었다.
“고마워.”
짧고 가벼웠지만, 그 말은 내 속을 천천히 데웠다.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복도가 아주 조금 비스듬해진 것 같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같은 문제를 다시 풀어 보았다. 이번에는 손이 덜 떨렸다. 답을 구하고 난 뒤에도 한동안 손을 치우지 못했다. 그 짧은 시간, 그녀의 숨결과 목소리, 종이 위로 떨어진 그림자의 각도가 내 하루 전체를 환하게 밝혔다.
그날 이후, 질문은 구실이 되었고, 구실은 습관이 되었다.
완전히 모르는 문제만 들고 간 건 아니었다. 거의 다 풀린 문제에서 마지막 한 줄만 남겨 보이기도 했고, 해설지에 작은 포스트잇을 붙여 ‘여기까진 알겠는데 여기서 막혀’라고 적어 보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연필을 쥔 손목의 각도, 공책을 책상 모서리에 살짝 걸치던 버릇, 설명을 마치고 나서 자기도 모르게 “됐지?” 하고 확인하는 습. 그 모든 게 일정했고, 안정적이었다. 세상 어디에도 내 자리가 확실하지 않은 것만 같은 날에도, 그녀의 말투와 리듬만은 변하지 않는 달력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그녀는 미술실로 갔다.
나는 가끔, 정말 가끔 그 뒤를 멀찍이 따랐다. 미술실 창문은 다른 교실보다 낮았고, 그 아래로 흘러내리는 햇빛이 더 부드러웠다. 그녀는 색연필을 나란히 정렬하는 데 시간을 들였고, 색을 바꿀 때마다 캡을 끝까지 눌러 닫았다. 그러고 나서 종이를 돌려 가며 선을 그었다. 사람이나 풍경보다, 색들이 서로 겹치고 스며드는 경계에 마음을 두는 듯했다. 누군가의 얼굴이 아니라, 공기 자체를 그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운동 잘한다며?”
어느 날 그녀가 불쑥 물었다.
나는 당황해 “뛰는 건 조금?” 하고 얼버무렸다.
“계주 할 때 마지막에 치고 나가는 거, 운동장에서 몇 번 봤어.”
색을 바꾸며 그녀가 말했다. “호흡이 좋더라.”
그 말은 오래 씹혔다.
누군가가 내 ‘호흡’에 대해 말해준 건 처음이었다. 빠르다, 느리다의 잣대가 아니라, 내 방식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 그 말은 이상할 만큼 몸 안쪽에서 오래 반짝였다.
겨울이 더 깊어갈수록, 나는 조금 더 자주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도서관에서 마주치면 사서에게 반납할 책을 대신 들었고, 같은 조가 된 과학 실험에서는 비커를 붙잡아 주며 메모를 했다. 그녀가 노트를 덮을 때마다 실처럼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책상에 한 올 떨어졌고, 나는 손에 쥔 지우개를 괜히 더 뽀얗게 만들었다. 손가락에 분필 가루가 묻는 날이면 그 손으로 귀 뒤를 긁어 보았고, 아주 작은 하얀 점이 귓불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