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아래의 집에서

by 네로

미술실 문을 미는 소리는 늘 작았다.

낮게 내려앉은 창은 바깥보다 한 톤 밝았고, 먼지 입자들은 빛의 기울기에 따라 미세한 황금을 흩뿌렸다. 싱크대 옆엔 물감이 말라 굳어 층층의 껍질을 만들고 있었고, 석고상의 겨울 같은 뺨에는 누군가 손자국 같은 닦은 자취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색연필을 줄 세우는 데 시간을 썼다.

빨강 옆에는 분홍이 아닌, 버건디. 파랑 옆에는 청록이 아닌, 회청. 이미 정해진 규칙 대신, 자신만의 스펙트럼을 만들었다. 색과 색이 포개지는 중간을 오래 쳐다보았다. 선명한 이름이 붙지 않는, 그렇다고 흐려지는 것도 아닌, 잠시만 존재하는 작고 고요한 빛의 구역.


“여긴 왜 이렇게 두꺼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스케치북 가장자리를 들어 올렸다.

겹겹이 칠한 종이가 물기를 먹고 마른 뒤 만들어진 올록볼록함.

“겹쳐야 보이는 게 있거든. 얇게는 안 보여.”

그녀가 웃었다. “사람도 그렇지 않나?”


말은 가볍게 던졌지만, 내가 오래 주워 들고 있을 것을 그녀도 알았다.

나는 그 말들을 포켓에 넣어 다니며, 버스 창에 비친 내 얼굴과 한 번 더 겹쳐보곤 했다. 얇게 칠한 날은 잘 지워졌다. 겹쳐 칠한 날은 지우개가 금방 닳았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종종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그때마다 들어온 햇빛은 스케치북 위 사선으로 앉았다가, 그녀의 손목을 한 번 쓰다듬고 내려갔다. 톤은 늘 일정했다. 급하게 어두워지지도, 갑자기 밝아지지도 않았다. 마치 숨을 오래 참을 줄 아는 사람처럼.


“너, 호흡이 좋아.”

어느 날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달릴 때만?” 내가 웃자

“살 때도.”


그 말은 귀 안쪽, 내가 몰래 숨겨둔 빈 공간에 와서 박혔다.

그곳은 오래 울렸다. 누군가 내 삶의 리듬을 이름 붙여 주는 일은 생각보다 깊이 파고들었다. 그날 밤, 나는 공책 맨 끝 여백에 작게 적었다. 호흡. 끝까지. 겹쳐 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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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해는 낮게 기울어 있었다.

창문 밖으로 비친 햇빛은 낡은 커튼 틈새를 지나 방 안 바닥을 길게 스쳤다. 장판은 오래 닳아 윤이 났지만, 그 윤은 반짝 거림이라기보다 오래된 습기의 냄새에 더 가까웠다. 방 안 공기는 히터 하나 없는 집답게 서늘했고, 그 서늘함은 마치 숨을 들이쉬자마자 심장 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식탁 위에는 미처 다 비워지지 않은 국그릇이 남아 있었다. 김은 이미 사라졌고, 남은 건 얼룩진 국물 자국뿐이었다. 옆에는 반쯤 비어 있는 단무지 접시와 구겨진 종이 냅킨이 놓여 있었다. 밥을 먹었다는 증거는 분명히 있는데, 누군가 앉아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고요한 공기였다.


아버지는 창가에 등을 돌리고 앉아 담배를 말아 물었다.

낡은 손끝에서 마른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담배 끝에 불을 붙이는 동안, 불꽃은 잠깐 이 방 안의 어둠을 밀어냈다가 금세 사그라졌다. 담배 연기는 낮은 천장 밑에 희미한 안개처럼 퍼졌다. 아버지의 얼굴은 붉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저 오래된 돌덩이처럼 무채색으로 굳어 있었다.


“대학은 안 된다.”

아버지는 단호히 말했다. 숨을 내쉬는 속도보다 훨씬 빠른 말투였다.

“네가 벌어올 돈으로는 어림없어. 잔말 말고 농협에 들어가. 더 늦기 전에 자리 잡아야 한다. 아버지가 다 이야기해놨어.”


말끝은 낮았지만, 그 낮음 속에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마주 놓인 빈 국그릇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고등어구이를 태운 듯한, 오래 남은 냄새가 스며 있었다. 목구멍이 뜨겁게 막히는 것 같았다. 입술을 열면 목소리가 나올까, 아니면 숨만 터져 나올까. 그 둘 사이에서 단어가 오래 머물렀다.


“아버지.”

결국 단 한 마디만 나왔다.

“저, 대학 가고 싶어요.”


말을 뱉고 나서야 심장이 박동을 다시 시작했다.

아버지의 시선이 느리게 내 쪽으로 옮겨왔다. 그 눈에는 화가 실려 있지 않았다. 대신, 긴 세월 같은 피로가 고여 있었다. 아버지는 담배를 비벼 끄며 짧게 중얼거렸다.


“꿈은 집어치워라.”

탁, 재떨이에 떨어진 재가 사라지는 소리가 방 안을 파고들었다.


언덕은 늘 같은 자리였지만, 날마다 기울기가 달랐다.

아침엔 차갑고 낮엔 묵직했다. 해 질 무렵엔, 올라가다 말고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아래쪽에서 보면 길은 길뿐이었지만, 위쪽에서 보면 사람의 표정들이 들어왔다. 누군가는 뛰어오르고, 누군가는 숨을 골랐다. 누군가는 되돌아섰다. 나는, 서 있었다.


아버지의 손바닥이 내 뺨에 닿던 순간 이후로, 언덕 아래엔 바람이 많이 불었다. 뺨의 열은 금방 빠져나갔지만, 손바닥의 각도와 흔들린 공기의 모양은 오래 남았다. ‘집어치워라’라는 말보다 더 오래 남은 것은, 그 말이 미처 닿지 못한 반 박자였다. 그 반 박자 동안, 나는 아버지의 떨림을 보았다. 담배를 찾는 손.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빼는 습관.


학교에 가려면 언덕을 올라야 한다.

그녀가 언덕 위에서 기다리던 게 보여서, 나는 반쯤만 오른 위치에서 멈췄다.

오를까, 돌까. 발목엔 어제의 진흙이 굳어 있고, 장갑 안 손가락 끝은 천천히 저려왔다. “누구한테 맞았어?” 그녀가 물었다. “아버지.” 답하는 동안 내 목소리는 내 몸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건 부끄러움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오래된 집의 문을 혼자 열어야 할 때의 어둠 같은 것.


그녀가 내민 캔은 미지근했다.

미지근함은 흔적이었다. 한 자리에 서서 오래 들고 있었던 시간, 내가 오르지 못하면 내려갈 생각까지 했던 시간. 그 온기를 나는 한동안 측정하듯 쥐고 있었다. “아팠겠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것이 위로의 최저선이라는 것을, 그 말이 내가 견딜 수 있는 바로 그만큼의 온도라는 걸 알았다.


“모든 건 돌아.” 그녀는 캔의 윗면을 손톱으로 쓸며 말했다.

“상처를 주면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와. 다른 사람이 너를 상처 입혀도 너는 상처를 주지 않았으니까, 또 돌아올 거야. 너는 틀리지 않아. 알고도 바꾸려고 했으니까. 실패해도, 그건 너한테 남을 거야.”


나는 그 말을 언덕의 기울기에 놓아 보았다.

조금 완만해졌다. 발끝으로 작은 돌을 굴리며 한 걸음 더 옮겼다. 숨이 허파 안쪽 기슭을 닦으며 드나들었다. 올라선 자리에서 내려다보니, 내가 방금 지나온 경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이후로 언덕은 우리가 자주 서는 좌표가 되었다.

언덕 위에서 우리는 자주 말을 덜 했다. 대신 바닥에 새겨진 신발 자국을 세었다. 내 것은 대체로 깊었고, 그녀 것은 폭이 좁았다. 두 자국이 간혹 포개지면, 둘 중 하나는 잠깐 사라졌다가 옆으로 옮겨 나타났다. 사라지는 동안의 모양이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