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발표, 그리고 빈자리

서로 다른 길 위에서

by 네로

선생님이 불러주는 순서대로 앞으로 나가 수능 성적표를 받아보았다.

내 이름 옆에 찍힌 숫자는 놀랍지도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절차 같았다. ‘평균’이라는 단어보다 조금 낮거나 조금 높은 곳을 맴돌던 3년의 끝. 하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안쪽 어딘가에서 작은 금속이 끼익—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곳에 있었다.

헛되이 보낸 이 3년간.

지금도 3년 전과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데도 세상은, 사람들은, 시간은 모두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끝없이 굴러가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위를 바라볼 수도 없었다. 현상 유지조차 쉽지 않았다. 악착같이 발버둥 치지 않으면 밀려날 것 같은 나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무언가에 쫓기듯 달려야 하는 삶.


‘이 작은 마을에서, 나는 대체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그건 반드시 찾아야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의 인생이 텅 빈 복도처럼 끝나버릴 것 같아서. 그런데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혹시 내가 찾고 싶은 건 이미 과거에 묻어둔 채, 두 번 다시 파낼 수 없는 게 아닐까—. 그 소중한 것들이 이미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가 버린 건 아닐까.


그렇게 초조한 나날 속에서, 결국 내가 찾아낸 일자리는 이 마을에 있었다. 화물운송을 하는 업체였다.

적어도 이곳에서 차로 1시간쯤은 벗어나고 싶었는데, 어떤 사소한 희망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눈앞에 놓인 현실은 차갑고, 숨을 들이마실수록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치 앞으로의 인생을 미리 경고하는 예고편처럼 느껴졌다. 교문을 앞에 두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3년... 헛되이 보낸 것 같지만, 즐거웠어.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즐거웠다.”

그리고 그것이 이 학교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깊게 감사하는 마음을, 끝내 말하지 못한 채 삼켰다.

뒤돌아보지 않은 채, 천천히 학교를 걸어 나왔다.


학교를 나서는데, 그녀가 서 있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차가운 바람이 스쳐가고, 먼지처럼 흩날린 분필 가루가 햇빛에 부유하는 듯했다. 나는 지금의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은 교실, 같은 시간 속에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멀리 와버린 걸까.


나는 입을 열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우린... 무슨 얘기를 했었지? 어떻게 웃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어떻게 행복을 만들 수 있었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그녀는 잠시 눈을 내리깔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무리야.”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현실은 단단했다.


나는 말했다.

“눈이 녹으면 졸업이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나는 서울로 갈 거야.”


이 마을을 떠나,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그녀.

거기엔 새로운 만남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대화, 새로운 빛들. 그녀는 점점 변해 갈 거다. 기대받고, 노력하고, 보답하며, 깨닫기도 전에 믿기 힘들 만큼 먼 곳에 도착해 있을 거다.


반면, 나는 이 마을에 남는다.

매일 땀을 흘리고, 언제까지나 같은 자리를 맴돌겠지. 어쩌면 아버지처럼 농사도 짓고 가끔 출산한 송아지를 판매하며 부수입을 얻겠지.

서로 다른 궤도를 그리며 살아가는 두 사람— 계속 이렇게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내가 네가 있는 곳으로 갈게.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어.

나도 결국 원을 그리며 도는 거니까.

네가 눈치채지 못할 뿐이지.”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겨울 하늘이 비쳤다.


순간, 바람이 불었다. 내 볼을 스친 눈송이가 녹아내리며 차가운 물방울로 떨어졌다.

나는 대답 대신 숨을 크게 삼켰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나에게도... 노력하게 해 줘.”


결과는 느리게 왔다.

느리게 온 결과는 대개 덜 아팠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나는 실패했고, 그녀는 합격했다. 그녀의 점수로 가지 못할 곳을 찾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종이는 같은 두께였지만, 내용은 다른 무게였다. 그녀는 내 앞에서 종이를 접었다. 접힌 선이 칼처럼 날카로웠다.

“축하해.” 내가 말했다.

“고마워.” 그녀가 말했다.

말 뒤에 한참이 있었다.

우리는 그 한참을 나누어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