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속도의 길

by 네로

창고의 밤은 늘 같다.

형광등이 한 번에 켜지지 않고, 세 칸쯤 늦게 깜박이며 따라붙는다. 지게차의 경고음이 규칙적으로 울고, 팔레트 위에 쌓인 상자들이 비닐 랩에 싸인 채 축축한 숨을 쉬고 있다. 나는 손등이 허옇게 벗겨진 장갑을 끼고, 박스의 라벨을 스캐너로 긁는다. 삑— 소리가 나면 약속처럼 화면에 숫자가 올라온다. 오늘도 정해진 분량, 정해진 동선, 정해진 시간.


쉬는 시간, 나는 창고 구석 철제 사물함 위에 앉아 공책을 펼친다.

볼펜으로 짧게 적는다. 문장은 늘 나보다 앞서 달리고, 나는 그 뒤를 헐떡이며 쫓아간다. 몇 줄 쓰다 말고 다시 지우개를 집어 든다. 종이가 얇아져 금세 속이 비친다. “괜찮아, 다시.” 혼잣말이 입술에서 김처럼 피어오른다.


“뭐야, 그거.”

어느 날, 퇴근길에 그녀가 물었다.

창고 앞의 가로등 아래, 그녀의 코트 깃에 붙은 먼지가 하얗게 빛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공책을 닫아 작업복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건, 이렇게 숨기지 않아.”

그녀는 웃으며 내 장갑을 벗겨 손등을 봤다. 갈라진 곳에 약을 발라 주고, 낡은 밴드를 붙였다.

“네가 너를 챙기는 걸 보면, 나도 좀 마음이 놓여.”


그녀는 늘 그렇게 말했다.

나는 늘 그렇게 대답했다.

“괜찮아.”



창고 일을 그만두고, 나는 운송회사에 들어갔다. 대형면허를 취득해서 운전기사 일을 배우기 위해서다.

처음부터 트럭을 구매하기엔 너무 비싸기도 하고, 자세하게 배워보기 위해 입사한 곳은 그녀의 아버지의 회사였다. 정식 면접을 봤고, 그는 말수가 적었다. 그녀의 집에서 봤을 때보다도 더 말이 없었다. 처음 한마디는 이것뿐.

“짐 고정은, 배보다 배꼽이 크면 안 된다.”

라쳇을 당기고, 체인을 걸고, 모서리에 코너보드를 대고, 다시 끈을 당긴다. 나는 내 손이 어떤 방향으로 힘을 써야 안전한지 배웠다. 한 끗 빠뜨리면 도로 한복판에 상자가 터져 나오는 걸, 사진으로 봤다. 하얀 폼, 깨진 병, 젖은 비닐, 낮은 비명.


처음 혼자 달린 밤, 국도는 얼음장처럼 얇았다.

나는 2차선과 1차선 사이를 똑바로 가르는 선을 처음으로 믿었다. 터널 앞에서는 속도를 줄였고, 고개를 넘을 때는 엔진 브레이크를 먼저 밟았다. 휴게소에서 15분, 종이컵 뚜껑을 열어 국물만 마셨다. 탁한 조명이 기름처럼 깔려, 사람들 얼굴 윤곽이 조금씩 흐려졌다. 한쪽 구석, 조경수 옆의 낮은 잔디에서 나는 장갑을 벗고 허리를 숙였다. 세 잎클로버가 더 많았고, 네 잎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손끝으로 천천히 더듬으면, 아주 드물게, 하나가 걸렸다. 나는 조심히 꺾어 공책 속 빈칸에 눌러 넣었다.

그 아래 썼다.

“오늘은 무사. 다음엔 더 잘.”


운행 일지의 숫자는 늘 변했지만, 공책의 문장들은 서서히 같은 모양을 닮아갔다.

— “너는 오늘도 그림을 그렸니.”

— “나는 오늘도 도로를 그렸다. 길의 선, 가로등의 간격, 날씨의 음영.”

— “네가 좋아하는 회색, 내가 좋아하는 파랑.”

나는 노트의 뒤쪽에 작은 봉투를 붙였다.

휴게소 화단에서 주운 단풍잎.

작업장 담장 밑의 이름 모를 꽃잎.

운동장 펜스 너머에서 떨어진 은행잎 한 장—한때 그 곁에 서 있던 너의 목소리.


그녀는 점점 멀리, 그러나 점점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창작문화예술대전에 입선했다는 소식이 먼저 들려왔고, 나중에는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도 상을 받았다고 했다. “천재”라는 말이 기사에 붙었다. 나는 그 단어가 주는 정적을 처음 알았다.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고 나서도 이름이 남는 사람.” “교과서에 실릴지도 몰라. 아니, 박물관에 영원히 전시되겠지.” 그 말들은 내 주변의 공기를 바꾸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공기의 농도는, 내가 지키려는 것의 무게를 가벼이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히 붙잡게 했다.


유학 얘기가 나왔고. 그녀는 주저했다.

“가라고 하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않을게.”

나는 대답했다.

“가. 꼭 가. 그래야 네가 네가 돼.”

말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 말이 내게서 한 조각을 떼어내 간다는 걸.

그럼에도 나는 축하했다. 진심으로.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웃음은 오래전 언덕 위에서 내민 미지근한 캔을 닮아 있었다. 늦게 건네지만 확실히 따뜻한 것.


전시장은 조용한 소음으로 가득했다.

사람들의 발끝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 가까운 대화가 겹쳐지는 낮은 속삭임, 플래시가 켜졌다 꺼지는 순간마다 공기 중으로 퍼지는 따뜻한 열감.

조명은 눈부시게 밝았지만, 그는 전시장 구석, 그 빛의 바깥쪽에서 서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들이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태어난 색들이었다.

겹겹이 칠해진 붓 자국들이, 계절의 흐름처럼 서로를 덮고 스며들어 있었다. 초록 위에 파랑이, 파랑 위에 붉은색이 얇게 얇게 번져가듯. 사람들은 그림 앞에서 잠시 멈춰 서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천재야. 이 나이에 이 깊이를 낸다고?”

“아직 대학생이라는데, 믿겨져?”


나는 고개를 떨군 채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발밑에서 흘러나오는 묘한 감각이 있었다.

세상의 조명이 그녀에게 쏠리는 만큼, 자신의 그림자는 점점 더 짙어졌다.

조금 전까지도 기름의 냄새를 지우지 못한 손끝이, 괜스레 호주머니 안에서 움츠러들었다. 손톱 밑에 남은 작은 상처 자국, 아침까지 짊어진 냄새가 부끄러웠다.

눈앞에서 그녀가 웃고 있었다.

교수와 평론가, 갤러리 관계자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이야기했다.

빛이 그녀의 머리칼을 스쳐 반짝였고, 검은 원피스의 곡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웃을 때마다 조금 더 빛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웃음 사이에서, 나는 자신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 내 쪽으로 오려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팔꿈치를 가볍게 잡아당겼다.

나는 오래된 계단을 내려갔다. 바깥공기가 더 정직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경사로 옆, 작은 화단에서 나는 무심코 허리를 숙였다. 네 잎은 없었다. 세잎만 한 손에 가득 쥐고, 나는 주머니에 쓸어 넣었다. 그 잎의 선명한 초록이, 희한하게도 눈물의 색을 닮아 있었다.


며칠 뒤, 그녀는 자신의 자취방 우편함에서 작은 노트를 발견했다.

누군가 접어둔 종이봉투에 넣어둔 듯, 조금 눌린 모서리가 눈에 띄었다.

표지에는 아무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냥, 오래 쓰다 보니 가장자리가 살짝 닳은, 손때 묻은 노트였다.


그녀는 조심스레 펼쳤다.

첫 장부터 그의 글씨였다.

작고 촘촘한 글씨로 빼곡히 적힌 짧은 문장들.

어디선가 본 듯한 풍경들, 대수롭지 않은 일상 같았지만,

한 장, 또 한 장을 넘길수록 그 속에는 그녀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


“오늘은 그녀의 그림이 다른 색을 입은 것 같았다.”

“말하지 못한 질문이 하나 있다.”

“언덕 위에서 네가 건넸던 캔 음료의 온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노트 사이사이에 작은 것들이 끼워져 있었다.

네 잎클로버와 세 잎클로버, 단풍잎과 말린 들꽃.

색은 바랬지만, 눌린 시간만큼 그 온도는 선명했다.

한참 뒤에는 최근의 일들도 적혀있었다.

어쩌면 그는 현장에서 잠깐 쉬는 틈마다 이런 것들을 찾았을 것이다.

짧은 휴식 시간에 작은 풀잎을 꺾어 주머니에 넣고, 다시 트럭의 적재함을 짊어졌을 것이다.

그녀는 책상을 두드리며 한참 동안 노트를 내려다봤다.

이 작은 종이 안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계절이 눌려 있었는지 생각했다.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손때 묻은 종이의 결마다 살아 있었다.


“너는 오늘 파랑을 몇 번이나 겹쳤니.

나는 오늘 파랑을 몇 번이나 지나쳤다.”

“휴게소 3번 화단, 단풍잎 하나.

빨강의 속에는 검정이, 검정의 속에는 초록이.”

“언덕 위에서 네가 건넨 캔의 온기.

나는 아직도 미지근한 것을 믿는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납작이 눌린 잎사귀들이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네 잎클로버는 드물었고, 세잎이 훨씬 많았다.

어떤 날은 잎 대신 영수증이 들어 있었다.

— 경부고속도로 언양휴게소, 21:40, 대구따로국밥, 6,500원.

그 옆에는 작게 적혀 있었다.

“작업한다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 너에게 따뜻한 것을 먹이고 싶다.”

그녀는 공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양손으로 감쌌다.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단정한 문장보다 어설픈 문장들이 더 깊게 박혔다.

좋아한다는 말은 한 번도 없었지만, 좋아한다는 말 말고는 남지 않는 종류의 기록.

그녀는 손바닥으로 공책의 겉표지를 천천히 쓸었다.

그 손바닥에, 온기가 돌았다.


그날 새벽, 그녀가 내게 왔다.

그녀는 곧장 택시를 타고 나에게로 향했다고 했다.

말을 오래 맴돌던 사람이 갑자기 중심으로 들어서는 것처럼, 그녀는 곧장 내 앞에 섰다.

“있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 너무 조용해서 더 크게 들려.”

대답 대신 나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뚝을 감쌌다.

겨울밤의 살은 차갑고 얇아서 금방 떨림이 전해졌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바닥의 건조한 공기가 발꿈치를 당겼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턱에 닿았다. 아주 천천히, 우리는 서로의 숨을 그렸다.


그 밤, 우리는 피임을 하지 않았다.

그건 계산이나 계획이 아니라, 결심에 가까웠다.

어쩌면 무모했고, 어쩌면 지혜였다.

나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으며, 오래전 언덕의 기울기를 떠올렸다.

멈추지 않고 올라온 날의 호흡.

사라지기 전 가장 예뻤던 눈의 모양.


몇 주 뒤, 그녀가 말했다.

“아기가... 생긴 것 같아.”

말하고 나서 그녀는 내 표정을 오래 보았다.

나는 처음에는 멍했고, 그다음에는 두려웠고, 그다음에는... 웃었다.

그 웃음은 아마도 울음의 변주였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끄덕였다.

“고마워.”

그때의 고마워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고마워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전부 할게.”

그녀는 나를 끌어안고, 아주 작게 말했다.


“고마워.”

그날 밤, 나는 공책에 길게 썼다.

나는 오늘, 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노력은 더 이상 미루기의 다른 이름이 아니고, 버티기는 더 이상 패배의 다른 표현이 아니다.

네가 내게 준 이름—아빠—, 그 이름을 앞으로 매일 연습하겠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천재라고 말했다.

유학 이야기는 더 구체화되었고, 나는 더 오래 운전대를 잡았다.

장인은 말없이 내 옆에 서서 라쳇을 다시 한번 점검했고, 장모는 반찬통을 더 무겁게 만들어 건넸다.

우리는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 약속의 문장은 더 짧고, 더 단단했다.

그녀는 가끔 입덧을 했고, 나는 돌아가는 길의 휴게소에서라도 생강차를 사들고 뛰어갔다.

“이제부터 네가 먹는 건, 둘이 먹는 거야.”

내가 말하면 그녀는 웃었다.

“그러면, 네가 피곤한 건 셋이 피곤한 거네.”

우리는 그 농담을 오래 씹었다.

피곤은 더 이상 혼자의 것이 아니었다.


전시가 하나 더 열렸다.

그녀는 배가 아주 조금 나와 있었고, 검정 드레스의 라인은 여전히 곧았다.

나는 멀리서 보았다. 기름때가 묻지 않은 코트를 찾았고, 가장 깨끗한 신발을 골랐다. 그래도 내 발자국은 금방 들켰다.

사람들은 다시 말했다.

“이제는 해외에서 봐야 한다.”

“지금이 가야 할 때다.”

그녀는 내 쪽을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라고.

그녀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본인이 있을 곳은 여기—라고.



가을의 도래가 피부로 느껴질 즈음에, 중학생 티를 벗은 아이들이 조금은 커 보이는 교복을 입고 언덕을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졸업식장의 풍경이 귓가에 다시 떠올랐다.

교문 앞에서 뒤돌아보지 않던 내 등을, 이제는 내가 뒤에서 본다.

시간은 원을 그린다.

빠르게 도는 쪽도 있고, 천천히 도는 쪽도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속도로 돌았고, 그 원의 외곽에서 여러 번 어지러웠다.

그러나 언젠가 같은 직경의 원 두 개가 겹쳐질 때, 가운데 생기는 렌즈 모양의 좁은 영역—거기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곤 했다.

그 영역이 아주 작아도, 우리는 거기에서 온기를 나눌 수 있었다.

미지근한 것은 오래간다.

우리는 그걸 안다.


그녀는 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무섭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지.”

“그런데 왜 웃어?”

“무서운 것과 좋은 것은, 가끔 같은 모양이라서.”

그녀는 웃었다.

“그 말, 나중에 글로 써줘.”

나는 공책을 펼쳤다.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에 기대자, 종이에 닿는 볼펜의 소리가 겨울밤 난로의 소리처럼 아늑해졌다.

“너는 세상을 크게 밝히는 사람.

나는 어둠 속에서 작은 불을 지키는 사람.

둘이 있으면 해는 두 번 뜨고, 밤은 덜 춥다.”


가을, 그녀의 몸은 조금씩 달라졌다.
낯선 생명이 몸 안에서 자라며 그녀를 바꾸어 놓았다. 작은 움직임을 처음 느낀 날, 그녀는 울었고, 나는 그 눈물을 닦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겨울은 길었다.
창문 밖으로 성에가 얼고, 내가 손끝을 불어 녹이는 동안, 그녀는 침대 옆에 작은 노트를 두고 아이의 이름을 생각했다. 이름 뒤에 숨은 의미들을 하나씩 곱씹으며 계절을 넘었다.


그다음 해 봄, 우리는 세 잎이 훨씬 많은 잔디밭 한가운데 서 있었다.

네 잎은 드물었다.

그녀는 세잎을 하나 꺾어 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행운이 오지 않아도, 괜찮아.”

“왜?”

“우리는 이미 서로의 네 번째 잎이니까.”

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말, 네가 생각한 거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 노트에서 배웠어.”

그녀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같이 쓰자.”


우리는 함께 걸었다.

서로 다른 속도의 길 위에서, 같은 방향으로.

누가 더 빨리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멈추고 기다리는 법을, 다시 배우면 되었다.

사라지는 동안 더 예뻤던 것들을, 기억 속에서 오래 데우면 되었다.

겨울의 끝에서 봄의 초입으로 넘어가는 길목, 우리는 같은 높이에서 숨을 쉬었다.


4월의 어느 날,

비가 그친 새벽이었다.

병실 창문 너머에서 살구빛 새벽이 번지고 있었다.

짧고 고른 숨 사이로, 첫 울음소리가 터졌다.

작고 여린 목소리가, 오래 닫혀 있던 내 세상의 문을 열었다.


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가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져 아이의 볼을 적셨다.


그녀는 눈을 감고 속삭였다.

"사라지는 동안만큼은, 모든 게 예쁘지."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시간들이 겹쳐진 채,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


세상이 크게 흔들렸고, 우리의 안쪽은 조용히 단단해졌다.


나는 공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남은 칸이 거의 없었다.

가장 끝 줄에, 나는 천천히 썼다.


“나는 계속 원을 그릴 것이다. 아주아주 작게. 너희 원을 그리고 돌아오는 모든 날마다,

처음처럼, 다시 시작하겠다.”


겨울밤을 지나온 길이, 봄빛 속에서 얇게 반짝였다.

멀리, 트럭들이 쉬는 휴게소의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손안에 작은 심장이 하나 더 뛰고 있었다.

서로 다른 속도의 길에서, 우리는 마침내 같은 박자를 배웠다.

하나, 둘— 그리고 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