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쳐 칠하는 계절

by 네로

“네가 뭘 그렇게까지 지키려고 애쓰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늘 같은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도전해 보고 싶어요.”

내 목소리는 작은데, 의지는 단단했다.

“도전?”

아버지는 담배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네가 가진 게 뭐가 있다고. 도전도 가진 게 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거야. 왜 꼭 그 대학이어야만 하는 거냐? 다른 대학교도 많지 않니”


나는 말 대신 손끝을 바라봤다. 밤마다 무거운 박스를 옮기며 굳어진 손바닥, 피가 말라붙은 듯 딱딱해진 굳은살. 그걸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볼 겁니다.”


아버지는 한참을 나를 바라보다, 말없이 방을 나갔다.

그날 저녁, 지갑 안에 작은 두툼한 장갑 한 켤레와 아르바이트비보다 조금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나는 알았다.

그 침묵 속에 들어 있는 문장은, “해라. 하지만 다치진 마라”라는 뜻이었다.


겹쳐 칠하는 계절

밤마다 일했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오가는 트럭의 헤드라이트들이 도로 위를 찢고 지나갔다. 손끝은 저려왔지만,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함께 끝없이 반복되는 짐을 쌓았다 내렸다.


그녀는 그 시간에 화실에 앉아 있었다.

작은 캔버스 위에서 색을 겹쳤고, 스케치북의 여백을 천천히 메워 갔다. 우리가 쓰는 도구는 달랐지만, 어쩌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삶의 빈 곳을 조금씩 덧칠하며, 새로운 색을 만들어 가는 일.


때때로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굳은살이 늘었네.”

나는 웃으며 그녀의 손등을 가리켰다.

“빨강, 파랑, 노랑 다 묻었네.”

“겹쳐야 보이는 게 있거든.”

그 말은 미술실에서도, 인생에서도 같았다.


작은 약속들

겨울이 끝나기 전, 언덕 위에서 작은 약속을 나눴다.

“너는 빨라질 거고, 나는 느려질 수도 있어.”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같이 가자.”

“응.”

같은 문장을 서로 다른 단어로 반복하는 일.

그 반복 속에서 약속은 더 단단해졌다.

이전 15화창고의 밤, 손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