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아니, 눈을 뜨는 동작을 했다는 기억 없이 어느새 ‘본다’는 감각만 먼저 와 있었다. 소리가 없는 세계였다. 금속이 비집고 들어오던 냄새도, 타이어가 얼음막을 긁어내던 비명도, 멀리서 늘어지던 사이렌도 사라졌다. 숨을 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눈발처럼 희미한 빛의 입자들이 부유했고, 그 입자 사이로 아주 익숙한 발걸음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였다.
나는 한 발도 떼지 못했다. 허공에 박힌 못처럼, 제 몸보다 먼저 과거가 움직였다. 교실 창틀에 내려앉던 분필 가루의 반짝임, 겨울 운동장 가장자리에 얼어붙은 파란 그림자, 도서관 책장 사이로 스치며 나를 보던 옆얼굴—그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현재가 되었다. 손을 뻗고 싶었지만 손끝은 공기에서 망설였다. 다가가면 사라질까 봐, 부르면 깨어날까 봐.
나는 내 목소리보다 먼저 입술을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갈라진 목구멍을 겨우 통과한 말이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형태를 만들었다.
“트레일러... 기사는... 어떻게 됐어...?”
그녀의 눈동자가 가만히 흔들렸다. 마치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오래 기다린 얼굴로. 얕은 숨이 그녀의 어깨를 아주 조금 들었다 내렸다.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당신 말고는... 다 괜찮아.”
말끝이 닿자, 내 어깨에서 무엇인가 천천히 풀렸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었고, 믿지 못해 잠깐 떨렸다. 그녀는 한 번 더 내 표정을 읽었다는 듯 이어 말했다.
“트레일러 기사—다치긴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 없어. 정말이야.”
그제야 공기라는 게 있었구나 싶었다. 나는 큰 물 위에서 겨우 고개를 내민 사람처럼, 한 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목을 적시는 공기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채로, 오래 굶은 나에게 물처럼 들어왔다.
“... 다행이네.”
말 같지 않은 말이 새어 나왔다. 그 다행은, 나를 조금 가볍게 만들었다. 이제야 다른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 내가 이곳으로 밀려오면서 끝까지 놓지 못했던 또 하나.
“우리 아이는, 규담이는... 괜찮을까?”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흔들리고, 이내 잔잔해졌다. 고개가 느리게 끄덕여졌다.
“걱정하지 마. 괜찮아. 잘 자랄 거야. 잘 자라고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래 막아 둔 둑이 무너졌다. 울음이 목에서부터 차올라, 막을 수 없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 아래서 뜨거움과 차가움이 번갈아 밀려오고, 골막한 고요가 귀를 채웠다. ‘그렇구나’라는 생각과 ‘정말이구나’라는 생각이 엇갈려 부딪히며, 눈물이 줄줄 흘렀다. 울음은 소리가 없는데, 온몸이 울리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와 내 두 손 사이에 자기 손을 겹쳤다. 이상했다. 죽음 이후의 장소라는 낯선 말도 안 되는 공간에서, 그 손은 여전히 살아생전 그대로의 온도를 지니고 있었다. 흔한 말들이 떠올랐다. ‘이보다 더 정확한 말이 있을까’ 하고 잠깐 생각이 스쳤다. 살아 있을 때 마지막으로 잡았던 손. 그때와 똑같았다.
“많이 힘들었지?”
나직한 물음은 바람처럼 가볍게 들렸지만, 그 가벼움 속에 물의 깊이가 있었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고개를 저었는지 끄덕였는지, 울음 사이에서 몸이 흔들릴 뿐이었다.
그녀가 내 손등을 엄지로 천천히 쓰다. 손가락 마디 위로 지나가는 그 움직임마다, 내 안쪽에서 얼어붙어 있던 것들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오래된 얼음장 위로 미세한 금이 꽃처럼 퍼지듯.
“고생했어. 정말, 많이 애썼어.”
그 한마디가 내 세월 전부를 안아 올렸다 내려놓았다. 아이를 안고 잠든 밤들, 퇴근길 조명 아래 잠깐 멈춰 서서 숨을 고르던 겨울, 혼자 식탁에서 식어버린 밥과 말라붙은 국물을 마주하다 결국 불을 끄던 저녁, 글도 그림도 손에 닿지 않아 비어 있던 손—그 모든 것들이 눈물에 섞여 지나갔다.
나는 얼굴을 들었다. 그녀가 가까이 있었다. 어쩌면 내 울음 때문에 그녀의 눈가에도 물기가 번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눈물인지 빛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그 눈동자는 고요했다.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내 목소리는,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 없는 아이의 목소리처럼 떨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그 말은 살아 있는 동안 수도 없이 삼켰던 질문이기도 했다. 오늘에서야 겨우 입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내 뺨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의 따뜻함이 살의 온도를 기억하게 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 손으로 수없이 어루만져졌던 기억들이 손바닥의 문지방에서 돌아왔다.
“괜찮아.” 그녀가 속삭였다. “우리 몫은, 다 했어.”
그 말이 너무 빨리 끝나지 않도록, 나는 스스로 숨을 느리게 쪼갰다. ‘다 했다’라는 말은 무섭고도 편안했다. 끝과 안식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그럼...”
나는 끝내 아이에게로 갔다. 물처럼 늘 아이에게로. 그건 선택이라기보다 습관이었고, 습관이기 이전에 사랑이었다.
“규담이는,” 그녀가 웃었다. 봄날처럼, 아주 얕고 오래가는 미소였다. “잘 자랄 거야. 네가 그 아이 안에 실어 넣은 것들이 남아 있어. 끝까지 갈 거야.”
“내가... 뭘 남겼는데?”
나는 정말로 궁금했다. 돈도 많지 않았고, 시간이 넉넉하지도 않았다. 나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에는 아이에게 짜증을 냈고, 어느 날에는 약속을 미뤘고, 어느 날에는 그녀의 소식 앞에서 혼자 무너졌다. 내가 남긴 게 있다면, 결국 사라져 버릴 작은 생활의 먼지들일 텐데.
“많이.” 그녀가 말했다. “소금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 네가 매일 반복해서 쌓아 올린 습관들. 거창하지 않은 문장들.”
“문장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현을 잃었다고 생각했을지 몰라. 글을 쓰지 못하던 시간, 그림을 보지 못하던 시간. 근데 있지, 문장을 쓰지 않아도 사는 문장들이 있어. 당신은 매일 그것들을 썼어. 말없이 아이의 젖은 장갑을 올려놓는 일. 자다 깬 아이가 발로 찾는 담요 끝을 네 발로 먼저 당겨 아이 발끝에 맞추는 일. 아침마다 도시락 고무줄이 한 번 더 돌아가게 오른손 검지를 더 많이 비트는 일. 그런 문장들이야. 먹는 문장, 입는 문장, 쉬는 문장, ‘괜찮아’라는 문장.”
나는 그녀가 내 뺨에 올린 손을 더 깊게 기댔다. 그 말들이, 나를 뜨겁게 했다. ‘장문’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길게 썼구나. 비록 한 줄도 옮겨 적지 못했지만, 긴 글들을 살았다. 그것이면 조금, 괜찮아질 것 같았다.
“화실” 나는 중얼거렸다. “당신 없고 나서 한참 동안 못 내려갔어. 무섭기도 했고, 어쩐지 거기 들어가면 아주 오래 울 것 같아서.”
그녀가 웃음을 삼켰다. 슬픔과 사랑이 겹칠 때 나오는 웃음이었다.
“알아. 엄마가 정리해 주셨지. 먼지부터 닦고, 환기도 시키고. 당신이 처음 내려간 날—알고 있어. 벽에 기대앉아서, 거의 숨도 안 쉬고 그림들만 보는 당신.”
나는 그날을 떠올렸다. 발을 들여놓는 문턱의 삐걱댐, 오래 닫혔던 창문이 열릴 때의 공기. 캔버스가 나를 바라보는 듯해서, 나는 한동안 눈을 못 들었다. 그 뒤로 이어졌던 그림들—계절마다 한 장씩, 아이 나이만큼 겹쳐져 있던 색의 기록. 그림 뒷장에 눌려 있던 네 잎클로버. 병원 영수증 사이에 끼여 있던 작은 메모들. ‘규담이가 오늘 하고 싶은 말—’, ‘아빠에게 말하지 못한 말—’, ‘다음 봄의 계획—’. 나는 한 장을 읽고, 한 장을 껴안고, 한 장을 바닥에 엎드린 채 울었다.
“나 그거, 전시하려고 했어.” 나는 말했다. “아이가 스무 살이 되면. 당신이 남겨둔 계절들의 순서를 규담이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사라지는 동안은 예쁘지’—그 말을, 네가 어떻게 견뎠는지 보여주고 싶었어.”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고,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고마워.”
그 한마디가 내 결심 전부를 알아주는 것 같아서, 나는 또다시 눈물이 났다. 그러다 불현듯 겁이 났다. 내가 없는 이곳에서, 규담이가 그 그림들을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없으면 전시장 계약도, 초청장 발송도, 작품 운송도...
그녀가 먼저 말했다.
“괜찮아. 엄마도, 아빠도, 그리고 아버님도 알고 계셔. 당신이 남긴 노트—전시 계획, 대여 리스트, 연락처들 다 알고 있잖아. 규담이가 시간이 되면, 그 노트를 아버님과 엄마가 전해 줄 거야. 혼자가 아니니까”
나는 그 말이 너무 살아 있어서, 그대로 웃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나왔다. 살아 있을 때에는 이렇게 잘 웃지 못했던 것 같다. 웃음이라는 것이, 떠난 자리에서 더 쉽게 올라오다니. 이상하게 고마웠다.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아주 어렸을 때의 나처럼,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오래 준비해 놓았던 질문처럼.
“나는... 좋은 아버지였을까?”
그녀가 대답하기 전에, 내 가슴이 먼저 굳어졌다. 그 말의 끝에 따라올 수도 있는 두려운 문장들—‘충분하지 못했다’, ‘조금 더 했어야 했다’, ‘왜 그때는’—나는 그 문장들을 여러 번 상상해 보았고, 상상 속에서 매번 져왔다.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야’라는 부정이 아니라, ‘그럴 리가 없지’라는 놀람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또렷해졌다.
“좋은 아버지였어. 비교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는 숨을 멈췄다. 그녀는 예를 들었다.
“아이가 밤에 울면, 네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 냉장고 문을 열었어. 우유를 꺼내려는 게 아니라, 불빛으로 방의 어둠을 먼저 깨우려고. 아이가 눈을 비비며 그 불빛을 보면—울음을 그치곤 했잖아. 당신은 그걸 알고 있었어. 작은 빛이 먼저 와야 한다는 걸.”
“또, 아이가 열이 나던 밤. 체온계를 찾기 전에, 네 이마가 먼저 갔어. 네 이마의 열로 아이의 열을 재던 사람. 그건 숫자가 아니라 마음으로 재는 체온이었지.”
“작은 도시락통에, 네가 먹는 반찬을 조금 덜어 아이 칸으로 옮기던 아침들. 네가 먼저 포기하던 계란 반쪽. 당신은 늘 먼저 덜어 내는 사람이었어. 빈자리를 만들고, 아이가 그 자리에 앉도록 비켜나는 사람.”
그녀의 말이 계속될수록, 내 안에서 오래 잊었던 장면들이 하나둘 불이 들어왔다. 소소한 장면들. 무용한 장면들이라고 여겼던 일상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삶이라는 문장의 실질.
그녀가 나를 보았다.
“당신은 늘 마지막에 웃었어. 누구보다 나중에. 모두가 잠든 뒤, 설거지통에 손을 넣어 물을 빼면서—그때 웃었지. 아무도 못 보는 웃음. 그것도 사랑이야.”
나는 더 이상 울음과 웃음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저 입술이 떨리고, 눈이 뜨거워지고, 몸이 가벼워졌다 무거워졌다 했다. 그녀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는 그 품을 오래 기다려 온 것처럼, 너무 쉽게 기대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냄새가 났다. 바람에 마른 햇빛 냄새, 오래된 책장 냄새, 병원 복도의 물냄새,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겨울의 냄새. 그 냄새들이 겹쳐진 선율처럼, 아주 느리게 흘렀다.
“이제... ” 그녀가 말했다. “이제 쉬어도 돼.”
나는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쉬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동안 너무 오래 달렸고, 멈추는 것을 두려워했고, 멈추면 무너질까 봐 부러뜨려서라도 움직였기 때문이다. 쉬는 것은 허락이 필요했다. 누군가의.
그녀가 내 귀에 대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
그 말은 오래전 언덕 위에서 그녀가 내게 건넸던 미지근한 캔처럼, 손바닥에 온기를 남겼다. 나는 그 온기로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내 손을 잡고 걸었다. 처음에는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것 같았고, 다음에는 정말로 닿는 것 같았다. 어느새 빛이 길을 만들었다. 빛은 눈처럼 흩어지지 않고, 모래처럼 흩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밟는 곳마다 아주 얇고 투명한 체온을 남겼다. 뒤돌아보면, 그 체온의 길이 잠깐 반짝였다 사라졌다.
나는 한 번 돌아보고 싶어졌다. 정말로, 단 한 번만—그림자를 확인하듯, 버릇처럼. 그녀가 나보다 반 발짝 먼저 멈춰 고개를 저었다. 다정한 부정이었다.
“뒤돌아보지 말자. 우리, 익숙하잖아. 돌아보지 않는 연습, 오래 했잖아.”
나는 웃었다. 맞다. 우리는 오래 연습했다. 돌아보지 않는 법, 내려놓는 법, 사라지는 동안을 예쁘게 보는 법.
“그럼 규담이한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여기서 해도 될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딘가를 향해, 그러나 정확히 누구를 향해서인지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입술을 열었다. 규담아—하고 부르자, 아주 멀리서 아이가 답하는 듯했다. 실제로 들린 건지, 내 가슴이 만든 메아리인지 몰라도, 분명 있었다.
“아빠는 네가 자라는 동안, 네가 매일 한 걸음 바깥으로 나가는 걸 보며 안에서 한 걸음씩 나이 들었어. 네가 울 때 같이 울지는 못했지만, 네 울음이 멈출 때까지 손을 놓지 않으려 했어. 내가 잘한 것보다 못한 게 많을 거야. 그래도 나는 매일 네 쪽으로 갔다. 그것만은 기억해 주면 좋겠어.”
“그리고—엄마 그림, 꼭 봐. 네가 스무 살이 아니어도, 스무 살이 되어도. 계절마다 너에게 쓰인 색을 읽어줘. 그날의 공기와 빛을 잊지 않도록. 너의 발목이 무거워지는 날, 거기서 ‘사라지는 동안은 예쁘지’라는 문장을 다시 꺼내. 그 문장이 널 조금 가볍게 할 거야.”
“나는 너를 믿는다. 믿는다는 말을 남기고 가면, 정말로 믿는 게 되더라. 내가 조금 늦게 배운 것 중에 제일 고마운 것.”
말을 마친 줄 알았는데, 입술이 한 번 더 열렸다.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데, 이건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고른 길이야. 네가 살아 있을 세상에, 내 부재가 허전함이 아니라 너의 자리로 조금 더 넓어진 공기처럼 남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숨을 크게 쉬어라. 네 몫의 공기가 넉넉하다는 걸 잊지 마.”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웃고 있었다. 꽃망울이 터지기 직전의, 아직 소리 나지 않는 웃음.
그녀가 말했다. “다 전해질 거야. 시간이라는 건 멀어질수록 잘 들리는 부분이 있거든.”
우리는 조금 더 걸었다. 빛은 우리가 걷는 속도에 맞춰 길어졌다. 어쩌면 우리는 아주 짧은 거리를 아주 오랫동안 걸었는지도 모른다. 앞에는 물소리 같은 게 있었다. 파도가 아니라, 파도 직전의 숨. 흰 포말이 발끝으로 스며들었다. 따뜻했다. 겨울의 눈이 아니라, 봄날의 눈물처럼.
나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숨이 막히는 울음이 아니라, 숨을 쉬게 하는 울음. 그녀는 내 눈가를 손등으로 닦았다. 손등의 결이 기억과 닮아 있었다. 익숙하다는 건, 어쩌면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고생했어.” 그녀가 말했다. “정말.”
그 한마디가, 내 안의 시간들을 한꺼번에 풀었다. 매듭이 풀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다만 매듭이 있었던 자리의 혈이 돌아왔다. 손끝까지 따뜻해졌다. 나는 웃었다. 긴 꿈을 오래 꾸다 깬 사람처럼. 꿈인데, 꿈이 지나서야 현실이 되는 종류의 웃음.
“이제 가자.” 그녀가 내 손을 이끌었다.
“응.” 나는 말했다. “가자.”
우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우리가 남긴 체온의 길이 얼마든지 반짝였을 테지만,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서로의 손이 있었다. 서로의 보폭이 있었다. 서로의 속도가 있었다. 사라지는 동안만큼은, 모든 것이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가 나에게 고생했다고 한 말은, 바람에 실려 파도 위로 흩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내 쥐고 있던 것들을 놓았다. 내내 놓지 못하던 것들을,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규담이의 웃는 얼굴이 한순간 스쳤다. 멀어질수록 선명해지는 얼굴. 사라질수록 또렷해지는 이름.
나는 웃었다.
끝내, 편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