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그친 뒤의 새벽, 전시장 앞 유리문에 포스터가 붙었다.
〈겹쳐 칠하는 계절〉
— 한 사람의 화가가 남긴 아이의 시간,
— 한 사람의 아버지가 덧쓴 기록.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아이는 검은 재킷을 걸치고 전시장 문을 밀었다. 먼저 냄새가 왔다. 오래된 물감과 신선한 페인트, 그리고 종이와 나무의 약간 눅눅한 향. 아이의 눈동자가 한 장 한 장 그림 앞에서 멈췄다.
두 살의 자신이 있었다.
세 살, 네 살, 다섯 살. 그림 속 아이는 늘 웃고 있었다. 웃지 않는 순간조차, 눈가에 빛이 남아 있었다.
그림 옆 작은 선반엔 노트들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의 글씨.
간이 휴게소에서, 차창을 두드리던 비를 들으며, 새벽의 정거장에서—
곳곳에서 써 내려간 문장들이 그녀의 그림 사이를 이어주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엄마는 네 귓불에 단풍잎을 살짝 걸어 주었다.”
“발이 먼저 자랐다. 그래서 세상과 먼저 닿았다.”
“넘어지면, 무릎보다 먼저 바람을 봐.”
아이의 입술이 아주 조금 떨렸다. 볼에 빛이 번졌다가 사라졌다. 아이는 손등으로 눈을 훔치고, 다음 장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시장 가운데 작은 책상 위엔 붓 몇 자루와 그녀의 팔레트가 놓여 있었다.
마른 물감의 굴곡이 지형도처럼 남아 있었다. 아이의 손이 그 위를 아주 살짝 스쳤다.
거의 닿지 않을 만큼. 그 순간, 아주 멀리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의 귀에 목소리가 들렸다.
— “사라지는 동안, 더 예쁘다.”
엄마의 목소리인지, 아버지의 목소리인지, 혹은 둘의 겹침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아이에게는 어느 쪽이어도 중요하지 않았다. 둘이 함께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전시장 끝 벽에는, 아직 공개하지 않은 한 장의 캔버스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작은 팻말: 스무 살이 되는 날, 함께 엽니다.
큐레이터가 다가와 조심스레 끈을 풀었다. 천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봄의 빛. 아주 옅은 연두가 흰색 위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연두는 분명히 지금의 빛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빛.
그녀가 미처 그리지 못한 아홉 살의 다음을, 아버지가 말로 붙잡아 둔 시간과 겹쳐 한 장의 봄으로 만들어 놓은 듯했다. 아이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리곤 낮게 말했다.
“고마워요.”
누구에게 말하는지 몰랐지만, 분명히 둘에게 들렸다. 전시장을 나와 햇빛 아래 서자, 바람이 아주 조용히 불었다. 아이의 주머니 속엔 작은 메모 한 장이 있었다.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들고 다니던 노트에서 뜯어 넣어 둔 것. 그것을 코팅해서 가지고 다니고 있었다.
“끝까지 가겠다.
사라지는 동안을 예뻐하겠다.
사라지게 두되, 잊히게 두진 않겠다.”
아이의 발이 한 걸음 나아갔다. 그 발자국이 매우 작고, 그러나 매우 분명했다. 그리고는 가볍게 웃었다. 누군가의 오래된 호흡이, 자신의 가슴 속 호흡과 정확히 겹쳐지는 순간을 느끼며. 하늘은 옅은 봄의 초록이었다.
그 색 위에 바람이 얇게 덧칠되었다. 아이의 그림자는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곧게 섰다.
그리고, 오래 미뤄 둔 첫 문장을 꺼냈다.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는 손으로.
“사라지는 동안을, 사랑하는 이야기.”
그 문장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세계가 기다려온 대답처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