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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동문학가 강인석 Sep 08. 2017

그와 그녀의 변하지 않는 거리감

‘화양연화’의 ‘국수’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2000)’는 이야기가 매우 적은 영화다. 그와 그녀 사이에 존재하는 둘 만의 이야기 외에 다른 것은 거의 없다. 둘 사이의 대화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수 없이 많은 교감이 지배하는 영화다. 그 속에서 음식은 끊임없는 교감의 촉매제로서 기능한다. 

영화 화양연화에서 만날 음식은 '국수'이다.



국수를 사 먹는 그와 그녀는 외롭다!

  중년이 아름다운 장만옥과 양조위가 주연한 ‘화양연화’에서 가장 주목받는 음식은 ‘국수’이다. 이웃에 살면서 늘 스치듯 만나며 눈빛을 교환하는 두 사람이 만드는 이야기 속에서 국수는 그들 사이의 변하지 않는 균일한 거리를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교감의 촉매가 되기도 하고, 사랑의 한계를 담고 있기도 하다.

  1962년 홍콩. 옆집으로 이사를 오게 된 ‘차우(양조위)’와 ‘첸 부인(리춘/장만옥)’은 늘 가까운 거리에서 스친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좁은 거실이나, 좁은 복도에서 스치며 눈인사를 하는 두 사람은 가까이 존재하지만 삶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공유하는 한 가지는 거리 모퉁이를 돌아 만나는 국수이다.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녀는 늘 각각 혼자라서 밥보다는 가볍게 국수를 먹는다. 그녀는 국수를 사기 위해, 그는 국수를 먹기 위해 들르는 곳, 그 계단에서 늘 스치기만 한다. 

국수통을 들고 오르내리며 스치는 두 사람. 철저하게 외로운 존재들이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국수는 두 사람이 ‘혼자임’을 보여주는 아이콘이다. 아내의 잦은 야근으로 늘 혼자인 차우, 남편의 해외출장으로 늘상 혼자인 첸 부인은 같은 처지다. 그 처지를 대변하는 것이 국수다. 그의 아내와 그녀의 남편은 목소리와 뒷모습만 보여줄 뿐 그들과 철저하게 무관한 존재로 등장한다. 부부가 함께 식탁에 앉아 다른 반찬과 함께 먹는 밥이 아니라, 젓가락 들고 육수에서 건져먹는 국수는 혼자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철저하게 외로운 존재인 그들을 위한 음식이다.


 국수와 참깨죽그리고 교감하는 음식들

  그런 국수가 얼마 후에는 두 사람 사이에서 교감의 고리가 된다. 외로운 그들은 서로가 유일한 대화 상대가 되고, 무협 소설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간다. 그러다가 우연히 차우의 방에 갇히게 된 두 사람. 괜한 오해를 살까 봐 나가지도 못하는 그들은 국수를 나눠먹는다.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외로운 사람끼리 교감하는 고리로서도 국수는 그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한다.

두 사람의 가장 행복한 나날들, 화양연화


   두 사람이 교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음식은 국수보다 먼저 등장한 참깨죽이다. 아파서 출근을 못했다는 차우를 위해 그녀가 준비한 참깨죽은 두 사람 사이가 발전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후 두 사람은 항상 먹을 것과 함께 만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음식들은 두 사람의 관계 유지의 수단이자 교감의 증거이다. 마치 둘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고민하며 써 내려가고 있는 무협 소설의 자잘한 이야기들처럼, 음식을 통해서 둘의 교감은 쌓여간다.   


  시간 속 아름다운 유산으로 

  그의 아내와 그녀의 남편이 불륜 관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그런 관계로 발전하지 않는다. 국수는 더 이상 깊어지지 않고 균일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그들의 관계를 제시해 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늘 그만큼의 거리감이 있다. 달라붙지 않고, 엉키지 않고, 서로 녹아들지 않는 국수 가락처럼 그들은 늘 같이 있지만 따로 존재한다. 서로를 느끼고 확인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삶 속으로 깊이 뛰어들지는 못한다. 그들의 관계는 계속 그렇다.


   1963년 싱가폴. 차우의 공간을 찾아간 그녀는 그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여전히 균일한 거리감이다. 그녀는 차우의 침실에서 그의 채취를 느끼고, 차우는 자신의 방에 남아있는 담배꽁초에서 그녀의 입술자국을 발견한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느끼고 있지만, 거리감은 여전하다. 그리고 1966년 다시 돌아온 홍콩. 그가 살던 집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과 그녀가 살던 집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똑같이 촉촉하다. 

화양연화 그 시절은 유적과도 같은 삶의, 기억의 한 조각이다

  1966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홀로 찾은 차우는 역사의 유적에게 키스를 한다. 그녀와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삶의 시간 속에 유적처럼 남겨두려 한다. 다시 보고 또 보고, 찾고 또 찾을 수 있는 그런 유적처럼, 삶의 한 부분으로 간직한다.





   국수는 원래 유목민과 같이 이동이 잦은 집단에서 음식을 오래 보관하고 빨리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의미를 갖는 ‘화양연화’는 길고 깊은 생의 시간 속에 가장 아름다웠던 두 사람의 추억과 감정을 고이 담아둔다. 언제고 다시 찾아도 그때 그 아름다웠던 감정은 금방이라도 되살아 날 수 있다. 오래 보관하고, 빨리 꺼내서 먹을 수 있는 국수처럼 말이다. 

  다소 오래된 듯한 분위기와 고집스러울 정도로 한정된 음악을 사용하는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다면, 음악과 영상미에 압도되기 전에 배우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음식을 만나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될 것 같다. [영화가 맛있다/강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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