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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철학

당신과 내 세계가 평행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많은 다툼이 필요할까

 왜, 꼭 그렇게 말해야만 했니?
 내 뜻은 그게 아니잖아. 왜 그렇게밖에 못 받아들여?


나이가 들수록 상대와의 싸움은 길어진다. 그가 살아온 세계를 담은 언어와 내 세계의 언어는 정면으로 충돌해 조율에 많은 시간과 감정, '품'이 든다. 견고해진 내 세계에서 너라는 국가의 특이한 언어를 이해하고자 하니, 물렁하고 뭐든 배우려 달겨들던 어린 시절과 달리 당신의 말과 진심이 어렵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 지금 내 곁의 그와 나는 정말이지 치열하게 많이 싸웠다. 키치를 거부하고 내 스스로의 관념과 이상만 굳세게 들어있는 나의 세계, 키치건 뭐건 너그럽게 받아들일 준비가 됐음에도 특정 가치에서는 그의 사상과 반하면 엄격하게 거부하는 그의 세계는 공존하기가 참 어려웠다.


20대 후반에서 30대에 접어들며 친구들에게 연애(혹은 결혼)상대와 관련해 가장 많이 들었던 칭찬은 <날 있는 그대로 이해해 줘>혹은, <나한테 잘 맞춰줘> <싸울 일이 없어>였다. 좋은게 좋은거지 하고 듣다가 문득 물음표 등장. 과연,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적확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인걸까? (다 그렇지는 않다만) 관습적인 연애 개념에서 '많이 싸운다'라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의미하니, 그 부정성에서 멀어지고자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는 건 아닐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라는 닫힌 관계 속에서 [좋아보이는 관계]를 위해 싸움을 피하는 것이 과연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지는 보다 신중하게 돌아볼 일이다.


건강한 싸움과 성숙한 싸움은 있어도, 좋거나 즐거운 싸움이란 없다. 싸움이라는 행위 앞에는 [문제]가 존재하고, 관계 구성원이 서로 문제를 인식하는 순간 레드라이트가 발광하며 감정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하여 싸움은 좋거나 긍정적일 수 없고, 비열하거나 성숙하지 못한 인간 날 것의 모습을 드러내게도 한다. 보지 않았던가, 불과 1년 전 모 유명 토론 프로그램에서 사회적으로 높은 명망이 있는 보수, 진보 논객 둘은 사뭇 우아한 척을 하며 대립되는 의견을 말하지만, 서로의 의견을 비아냥과 조롱이 한껏 담긴 문장으로 사정없이 때렸다. 나름 연륜과 명예을 지닌 그들도 사정없이 서로를 가격하는데 한낱 우리는 얼마나 성숙한 태도로 싸움을 대하겠는가. 사정없는 펀치와 함께 감정의 찌꺼기는 싸움의 디폴트값으로 늘 따라붙는다. 그럼에도 너와 내가 같이 삶을 걸어나가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싸움을 더 성숙하게, 더 건강하게 맺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걸까?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토마스와 사비나가 중절모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료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게 마련이다. 내가 사비나와 프란츠 사이의 모든 오솔길을 되짚어본다면, 그들이 작성한 몰이해의 목록은 두터운 사전이 될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너]와 [나]는 다르게 태어났고, 다르게 살아왔기에 서로 이해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억겁의 시간이 주어질지어도 다른 자궁과 다른 환경에 있었기에 100%의 우리는 절대 만날 수 없다.  싸움이 어려운 이유는 같은 상황에서도 내가 뱉은 언어와 타인의 언어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나의 의미와 맥락을 친절하게 타인에게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말하는 사비나와 프란츠의 악보가 그렇듯, 삶에 연륜이 쌓인 이들의 언어 세계는 더욱 단단하고 견고하게 짜여져 타인의 세계와 융합되기가 더욱 어렵다. 이해를 위해서는 타인의 의미가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내 세계의 일부를 말랑하게 준비해야 하는데, 싸움에 앞서 내가 아닌 너를 위한 말랑한 세계를 준비하는 이들이 어디에 있을까. 보통 사람들이 싸움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win-내 의견을 위주로 관철시키는 것이지, 합의가 아닌 이유이다. 건강한 관계를 위한 싸움의 조건은 나의 세계를 누군가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닌 그와 내 세계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합의>와 <조율>이 목표가 되야하지 않을지.


어릴 적의 나는 '너는 내가 되고 (그렇다면) 나는 네가 될 수 있는' 관계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누군가가 나를 테이블로 끌어내면, 다시 내 방으로 들어가려 안간힘을 썼다. 우리가 지금 있어야 할 곳은 이 테이블 앞이 아닌 내 방이라고 떼를 쓰고 투정을 부렸다. 내 방으로 힘들게 들어온 그가 얼마나 지쳐있을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배경이 테이블이 있는 살롱이 아닌 내 방이 되었을 때, 비열하게도 나는 단조로움을 느꼈다. '내가 좋아하던 너는 어디에 있니?'


친구, 연인. 누군가에게 이끌린다는 것은 서로가 가진 [고유의 세계]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 세계의 일부가 나와 다르다고 해 타인의 고유한 세계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가 포기하지 않는 한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건강한 싸움은 나와 당신이 다르다는 점을 알고 타인의 세계가 나의 그것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자의건 타의건 협상 테이블에 앉는 행위로부터 시작한다. 그 테이블에 누군가가 온전하게 '옳다'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당신과 나 모두 틀렸고, 오로지 그 협상의 결과만이 '옳음'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서로에게 끌렸던 고유함은 훼손 없이 오랫도록 보존되며 현재, 그리고 미래성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분명 누군가는 내게 자신의 관계에 대해 (또) 말할것이다. <싸울 일이 없어>

부럽기도 하면서 부럽지 않기도. 치고 받고 싸워 헤질지어도, 온전한 당신과 내 세계가 더 가까워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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