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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feat.재취업)

서른이 넘어도 이십 대와 똑같이 사랑은 어렵고 갈 길은 멀다우


#1. 면접=고백

간절한 마음으로 자리했던 좋은 회사의 최종 면접장, 무엇이 잘못되었던가 곰곰히 돌이켜본다. 물론, 탈락이라는 최악의 결과값은 아니어도 예상했던 시나리오에는 없던 결과였다.

장점으로 철저하게 재단해 둔 모습이 오히려 신뢰할 구석을 만들지 못했던 전략의 실패였다.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다 보면 오히려 헛점이 뭘까 생각하게 된다는 쉬운 논리를 잠시 잊었던걸까. 과도하게 꾸며낸 모습으로 그들에게 마이너스가 아닌 물음표의 영역(더욱 무서운!)을 만들어 줄 최적의 여건을 만들어 준 것이 아니었던가.

남들이 하는 '취업은 고백과 같다'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더욱 실감이 난다. 잘난 스펙을 제 입으로 '잘났다'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장점과 인간미를 동시에 가진 사람임을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나는 어쩌면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사실 쥐뿔도 없음)'이 되 버린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내가 회사에게 열렬한 고백을 던진 후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해'의 상황이고, 다가오는 목요일 나는 나다움과 인간미를 무기로 안타를 날려야 함에 생각이 더 복잡해진다. 연애도 취업도 어느 하나 쉬운 길이 없어 기분이 숭하다



#2. 짜증의 세포분열

남들 다 쉬는 명절 연휴의 일요일, 그는 고향집에 내려가지도 못한 채 당직을 겸비한(!) 출근을 했다. 안타까운 나는 어제의 데이트에서 그가 좋아하는 카페를 가고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그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았다. 이상하게 나는 하루 종일 심드렁하다. 굳은 표정과 어색한 말씨. '너랑 데이트해서 너무 좋았다'라고 말하는 그와 반대로 난 뭐가 그리도 아쉬웠을까 생각한다.

점심 내내 식사 준비부터 식사 후 설거지까지 모두 책임졌던 것? 무거운 가방을 그저 들게 내버려 두어서? 소파쪽 자리에 한 치 고민도 없이 앉아버려서? 방어 노래를 불렀던 내게 그가 기대하라 했던 '떡값 디너'는 그가 너무나도 가 보고 싶던(난 사실 중식을 잘 소화하기 힘들다) 짬뽕과 꿔바로우로 끝났다는 아쉬움? 집에 돌아와 무거운 가방과 코트를 바닥에 벗어 던지고 침대에 누운 나의 앞에서 본인의 코트만 고이 걸어 보관하는 그를 봤을 때 나는 모든 서운함을 '부탁이 있어, 내 말을 잘 들어줬으면 해'라며 엉뚱하게 분풀이를 던졌다. 밉다. 밉다밉다하니 더 밉다. 사실 나의 베베 꼬인 속을 들여다 보면 결국 처음 어떤 불만 요소를 해갈하지 못한 채 쌓아두다 보면 연쇄적으로 부정적인 모습만 보일 수 밖에 없다는 만고의 진리가 있다.

미안하다, 알겠다 등 별 말도 없이 그는 모난 나를 뒤에서 안아준다. 심드렁할 바에야 차라리 본인에게 짜증을 내달라고 한다. 렌즈를 세척하고 침대에 돌아오니 웹툰을 보고 있던 그는 핸드폰을 끄고 날 꼭 안는다. 왜 이리 착해서 별 일에 짜증만 가득했던 나를 미워하게 하는지, 이렇게 착한 사람도 있다는 건 지난한 세상이 밉다가도 정말 모를 일이다.



#3. 나의 아름다운 연인, 자유로운 새

몇 년 전 읽은 책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을 다시 꺼내 들었다. 섹스의 시작부터 종료(남성의 오르가슴)까지 11분에서 착안한 제목이다. 큰 맥락에서는 성의 의미를 크게 다루고 있지만 파울로 코엘료가 이 책으로부터 하고자 했던 알맹이를 톺다보면 본질은 '사랑이 무엇이라 정의할것이며,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이다.


책에는 어느 여인과 새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어느 날 한 여인은 하늘을 나는 어느 새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 여인은 새를 사랑하고 경배했다. 여인은 혹여 새가 떠날까 걱정하기 시작하며 하늘을 나는 새의 능력을 질투했다. 여인에게 반했던 새는 이튿날 다시 돌아왔지만, 여인이 만들어 둔 함정에 걸려 새장에 갇히고 말았다. 여인은 매일 새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아주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새를 정복할 필요가 없된 그녀는 새를 향한 사랑이 날로 식어갔다. 날지 못한 채 사랑도 잃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새는 쇠약해져갔지만 그녀는 새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느 날 새는 죽었고, 그녀는 높이 날던 새를 기리며 서글퍼했다. 새가 죽고난 뒤 삶의 의미를 상실한 그녀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죽음은 그 새와 함께 하늘을 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당신을 찾아왔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 새를 자유롭게 놔뒀더라면, 당신은 그 새를 훨씬 더 많이 사랑하고 숭배했을거요. 하지만 이제 당신은 내가 없이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없소"


나와 새로 오롯이 존재하며, 내가 새에 대해 강력하게 느꼈던 사랑의 감정으로 있는 그 자리에 두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 사랑은 적당한 다름과 나름의 여백으로부터 깊어진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내가 이유없이 그에게 가졌던 불만의 심연을 따지다 보면 이유는 사실 나 자신이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그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여주길 원한 것-30년을 다르게 살았는데 어찌?-과 그 말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진 불확실성, 그리고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결과값에 기어코 승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나의 사랑을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 사랑으로 해석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는 나의 새장 속 그를 가두고 싶은 이기적인 여인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10년이 넘게 여럿의 연애를 거쳤지만 사랑은 내게 늘 난제였고 지금도 어렵다. 다만 기대해도 좋은 부분은, 내 사랑법과 시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마음 깊은 곳에 새기고, 책과 영화와 생각을 통해 배우고, 또렷하고 맑은 시선으로 상대를 보려 끊임없이 스스로 풍화 작용을 시키고 있는 내가 조금은 믿어볼 만 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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