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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신을 찾아서

영화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리뷰

학창 시절의 나는 종교를 갖고싶었다. 모태신앙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믿고 기댈 수 있는 친구들이 마냥 부러워, 나는 교회와 성당 등지를 떠돌며 신앙과 믿음으로 조금 더 편안한 삶을 꿈꿨더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모태신앙인 나는 성경과 경전을 읽으며 '왜?'라는 질문을 잊기 어려웠다. 잠언적인 성격으로 삶에 쉽게 녹여들여지는 이야기들은 소화하기가 쉬웠지만 <그래야만 하기에 그렇게 되었다>라는 다소 강요스러운 대전제의 경우 믿음으로 내리꽂기가 어려웠다. 그럴 때면 나는 훌훌 그 곳을 떠났다. 이해해야만 머물 곳이라 여기는 예민한 성격 탓일까. 내게 종교란 삶과 사랑과 죽음과 태도에 대한 정답을 내포하면서도 체제 유지와 선교를 위한 거대한 기호의 집합같았다. 정말 선지자들이 이러한 정치적인 요소까지 성서에 담았을까 하는 의문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웃기는 건 사실, 나는 신을 믿으며 앞으로도 믿고 싶다-신앙의 형태가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는 어디에 존재할 지 모르는 신을 끊임없이 찾아나섰다. 그러다 30대에나 접어들어 느즈막히 빠져든 요가는 <네 안의 신을 찾아라>라고 말했다. 내 안의 소리를 깨닫고, 내 몸과 정신의 소리에 집중해 내가 생각할 것 들과 고민하는 것들을 백지위에 펼쳐두고 찬찬히 하나씩 얹힌 매듭을 풀다 보면 그 안에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는 것. 그럼으로써 자기 안의 신을 당당히 대면한다는 것.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는 좋아하는 요가 선생님의 SNS 피드에서 아주 우연히 발견됐다. 중동과 동유럽, 남미의 <치코와 리타>같은 느낌의 귀여운 그림체와 이와는 완벽하게 다른 느낌의 철학적인 자막. 영화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는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로, 사랑, 일, 결혼, 죽음 등 삶의 다양한 단계에서 원리와 꺠달음, 이로서 평정을 위한 마음가짐을 이야기한다. 말썽꾸러기 여자아이 '알미트라'가 선지자 '무스타파'가 출소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함께 밟으며 길 위의 군상과 사건이 나타나고, 이와 관련된 삶의 각 단계를 주제로 한 짤막한 쇼트 필름이 보여지는 재미있는 구성이다. 더 흥미로운건 사랑, 결혼, 죽음 등을 주제로 한 쇼트 필름등이 세계에 내로라하는 일러스트/애니메이터들과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라이온킹 연출이라는 감독 PR밸류도 어마어마한데, 게다가 이런 애니메이터들과의 콜라보레이션이라니. 영화관에서 못 본 이들은 꽤나 아쉬울 모양이다(물론 나를 포함한다. 또르륵..)

자유를 목적으로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법. 어찌 자유롭다 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졸라매는 사슬을 끊지 않는다면? 사실 자유라 부르는 것이 가장 강력한 사슬이란다.  그 고리들이 눈부시게 반짝일지라도 말이지.
그러니 자유롭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은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단다.
그것이 폭군이라면 그 지위는 네 안에 세워졌고, 벗어던지고 싶은 근심이라면 그건 네가 선택한 것이며, 쫓아버리고 싶은 두려움이라면 그 뿌리는 너의 가슴속에 있지 두려운 대상의 손에 있지 않단다. 이것들은 네 안에서 빛과 그림자처럼 늘 뒤엉켜 있으니, 진정 자유로워짐은 근심 없는 낮이나 설움 없는 밤이 아닌 이러한 것들이 삶을 옭아매도 얽매이지 않고 그 위에 우뚝 설 때란다.


그대들은 함께 태어나 영원토록 함께하리. 죽음의 흰 날개가 함께한 나날들을 흩뜨릴 때까지. 신의 고요한 기억 속에서도 함께하리. 그러나 함께하면서도 서로 공간을 지녀라. 그리하여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되 사랑이 족쇄가 되어선 안 되고, 그대들 영혼의 해안 사이에 일렁이는 바다가 되게 하라. 서로의 잔을 채우되 한쪽 잔만 마시지 마라. 서로의 빵을 나누되 한쪽 빵만 먹지 마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되 서로를 홀로 있게 하라. 비록 하나의 음악을 자아내도 비판의 현들은 따로 있듯이.

마음을 주고받되 전부 내맡기진 마라. 생명의 손만이 마음을 감싸줄 수 있기에. 함께 서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진 마라. 사원의 기둥들도 떨어져 있으며, 참나무와 소나무도 서로의 그늘에선 자라지 못하기에.


잠언과 종교는 엄연히 다른 영역일까. 불교의 경전은 신에 대한 rationale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신을 만나기 위한 바른 삶의 자세를 이야기한다고 한다.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 또한 <옳은 삶의 가치와 바른 자아>를 세우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자, 맹자 등도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살 수 있을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어쩌면 종교는 관계 사이에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고, 잠언과 명상은 개인의 삶에 대한 깊이와 깨달음을 더하는 수단이 아닐까.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모든 인간들은 주어진 인생이 처음이고, 그 누구도 '이게 옳은 삶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운 진실이다. 누군가가 옳다고 말하는 정도에 올라 편한 인생을 걷고자 했으나 모태가 아닌 나는 결국 '왜 옳은가?'에 대한 질문에 거듭 부딪히며 결국 종교를 갖지 못했다. 다만 나보다 조금 더 산 이들과, 삶에 대한 남다른 깊이의 현자들이 전하는 무수한 깨달음의 방법으로 나로부터 세워지는 '옳은 삶의 방법'은 기대해도 좋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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