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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과 백건우, 젊은 건반과 나이 든 건반

두 세대가 표현하는 쇼팽의 섬세함에 대하여

어린 시절, 우리 집엔 큰 스피커와 플레이어가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 받아온지 모르겠으나 아무도 재생하지 않는 30장 내외의 클래식 전집이 먼지쌓인 채로 무심하게 존재했다. 나는 당시의 아이돌 노래를 얼기설기 묶어둔 테이프를 틀다 지치면 궁금한 마음에 CD를 틀었다. 엄마아부지는 TV를 보느라 바빴으나 나는 방에 콕 틀어박혀 핑클과 HOT와 쇼팽과 바흐를 들었다. 꼬마 따위가 이해하는 클래식은 100만분의 1도 되지 않겠지만 그 땐 그냥 그 곡이 아무 이유 없이 좋았더랬다. 누구나 피아노 학원을 다니던 그 때, 나는 고작 젓가락 행진곡 정도나 뚠딴거리던 실력이지만 피아노 의자에 앉아 바흐가 되었고 쇼팽이 되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쇼팽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엔 단지 듣기에 좋았고, 지금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서정적이고 음울하기까지 한 정제된 무드가 좋다. 다른 작곡가들이 광기 어린 실력을 자랑할 때 본인만의 정서를 예측할 수 없는 음의 조합으로 차분하게 풀어낸다. 동시대 활동했던 리스트가 엄청난 기교로 스타 플레이어가 될 때에도 그는 그의 길을 걸었다. 멜*이나 내튜브에서 쇼팽을 해석한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무대를 접하게 된 이유였다.


워낙 잘 알려진 조성진의 경우, 멜*의 콩쿠르 앨범을 너무 많이 들어서 내 ‘자주 들은 음악'의 top10에서 그는 자리를 떠난 적이 없었다. 나는 쉽게 말하면 ‘국내에서는 조성진이 쇼팽 찐이다’(저렴주의...)라고 생각했다. 예시로  서정의 절정이라고 생각하는 녹턴 op.48-1을 그가 연주했을 때, 만나선 안 될 어떤 이들이 광기어리게 사랑을 나누다 맞은 운명적인 비극에 처절하게 맺음하는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영화 속 연인은 20대의 젊은 모습이었기에 더욱 화려했고 붙타올랐으며 그리하여 그 끝은 더욱 안타까웠을까. 조성진의 쇼팽은 다른 곡 또한 모두 그렇다. 한 음 한 음 그는 터져나오는 날것의 감정을 입혀 곡을 하나의 드라마로 만드는 이 한 명의 천재는 건반을 통해 그 사실을 한껏 증명한다.


그리고 몇 달 전, 나는 백건우의 쇼팽 콘서트에서 같은 곡을 듣게 되었다. 세계적인 명장 백건우씨는 특유의 진중함과 차분한 터치로 무게감있고 정제된 톤으로 곡을 이끌었다. 조성진의 그것과는 다르게 그의 곡은 마치 연륜이 쌓인 한 노인이 젊은 시절의 비극적인 사랑을 담담히 회상하는 무드. 초반부에는 느리게, 느리게 잊혀졌던 감정을 끌어내고 어느새 그 시절의 감정에 빠져들었다가 이미 돌이키기엔 한 시대가 흘러버려 일종의 무력감과함께 현실로 돌아오는 장편의 드라마가 담겨있다. 20대를 떠나 많이 변해버린-자신마저 태우는 격렬한 사랑의 기회가 적어진 지금으로서 나는 백건우의 곡이 너무 슬펐다. 그는 회한일런지 모르지만(그 감정이 들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나이드는 중'에 있는 나는 그가 느낄 그 회한의 슬픔이 감당할 수 없이 아득하다. 그가 연주한 쇼팽의 다른 곡들 모두 한 음이 가지는 의미가 굉장히 묵직하고 오랜 시간을 담은 듯함축적이었다. 그의 연주는 담백하고 무덤덤해보일 수 있으나 여운이 길고 애잔하다. 공연장을 나오며 나는 백건우씨의 쇼팽 CD를 괘념치 않고 샀다.





쇼팽은 섬세함이다. 이미 인정받은 젊은, 또 나이 든 아티스트는 이 섬세함을 어찌 해석해야 하는 지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다. 재밌는 건 두 아티스트가 섬세함을 본인과 본인의 세대에 맞게 어떻게 풀이하고 있느냐가 정말 다르다는 점이다. 강단과 감정 그대로를 담은 조성진의 쇼팽은 마치 좋아하는 가수와 내가 같은 세대로 함께 나이들며 그 변주를 즐기듯 기꺼이 그 변화를 즐겨가고 싶으면서도, 비교적 유약하면서도 담담하게 감정을 표현하는-개인적으로는 보다 동양적이라고 생각했다- 백건우씨의 그것은 더 오랫동안, 나이가 들면서 몰랐던 부분을 하나하나 찾아간다는 느낌으로 곡을 즐길 수 있겠다는 기대가 든다.


젊은 건반은 젊은 그대로 좋고, 나이 든 건반은 따를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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