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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는 농담

삶의 끝자락에서 그는 스스로 구원하는 방식을 보았다. 

지리한 아홉수 3년을 지낸 나의 너덜너덜한 멘탈에 친구들은 허지웅씨의 책을 꼭 읽어보라고 했다.


삶의 아름다움과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죽고싶은 자가 살기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격무에 시달리다가 당이 떨어졌을 때 편의점에서 산 초콜렛이 주는 찰나의 달콤함. 육아 전쟁에 시달리다가 울던 아이가 투정을 그치고 잠시 방긋 웃었을 때의 행복감. 바라왔던 무언가의 기대하지 않았던 지난한 과정 속 기대했던 무언가가 점으로 발현될 때 부지불식간에 탄생하는 ‘점’과 같다. 


음악을 들으면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백건우씨의 Schubert impromptu (D.899) Op.90 No.3



허지웅씨는 암 투병 환자였다. 암 치료의 비 경험자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사실 책을 몇 번 돌려 읽어도 그가 말한 치료 용어는 매번 낯설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사람이 큰 시련을 겪고 나면 삶을 보는 시선이 더 성숙해진다고 하던가. 그는 고통으로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일상을 겪고 살아있는 순간들의 귀중함을 깨달은걸까. 살아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귀중한 순간들, 가족애와 연애, 그리고 안다는 것의 아름다움과, 일상 속 만나는 귀중한 경험의 자리에 어떠한 마음으로 놓여져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거창한 철학마냥 하나의 굵은 신념으로 살 것을 말하지 않는다. 혹은 살랑이는 봄바람과 코를 간질이는 꽃냄새에 행복하라는 어려운 주문을 하지도 않는다. 피해의식이나 미련에 얽매이지 않은 절대적 나로서 살아가는 아름다움에 대해 얘기하며 그것이 우리가 주어진 시간을 ‘잘’ 살아내고 또 더 살고싶은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결심들을 잘 지켜내어 성과가 쌓이면 삶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결론에 집착하는 건 가장 피폐하고 곤궁하고 끔찍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가장 훌륭한 안식처다. 나도 거기 있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죽음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는 다른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동안, 나는 죽음 이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어떤 종교의 말대로 삶은 신이 인간에게 준 ‘과제’일수도 있다. 

그 과제 속 우리는 시간 가득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을 담아 산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원. 고통

삶이 과제이건 축복이건 우리는 우주의 작은 점이 되어 점을 선으로 이어나가고, 그 선은 거대한 하나의 면이 되며 한 세기의 시간을 꿰고 메꾼다. 거창한 이유와 명분으로 태어났고 살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당연히 존재해야 했고, 주어진 시간을 더 진지하고 뭉클한 선으로서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가 삶을 대하는 최선의 자세일 수 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제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환경과 질병의 아이러니가 참 많지만, 혼란한 시대의 삼라만상 속에서도 사람은 죽고, 병들고, 자라고, 태어나고, 그리고 삶의 실들은 제 모양대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사람은 혼자 태어나고 혼자 죽는다. 모두 고독한 개인의 삶에는 상대성이 없고 절대성만 있을 뿐이다. 


내가 스스로를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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