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케케묵은 논쟁을 이제 와서 꺼내기는 조심스럽다. 이 논쟁은 RPG의 여명기에나 통용될법한 논쟁이기 때문이다. 이 논쟁이 보편적으로 유효한 설명력을 갖는 시기는 고작해야 80~90년대까지다. 근래 발매된 WRPG나 JRPG의 게임 디자인을 분석해보면, 이 논쟁에서 언급한 형식적 특징에 부합하는 경우는 극히 일부분의 게임에 불과하다. 시의성과 전혀 연관성이 없는 논쟁이라는 소리다.
그럼에도 이 논쟁을 언급해야 할 이유가 있다. RPG라는 장르는 항상 당대 게임의 조류를 반영하는 역할을 해왔으며, 게임계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장르도 단연 이 장르였다. 그만큼 이 장르적 논쟁은 한때 가장 메이저 한 논쟁이었다. 수많은 플레이어에게 영향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이 장르에서 나타난 형식적 특징들이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타 게임 장르에 끼친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게임 디자이너들의 대다수는 위 논쟁의 대상이었던 게임들을 플레이하면서 배웠고 게임적 요소들을 하나둘씩 변증해나갔다.
게임 내러티브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논쟁을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현대의 CRPG를 포함하여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작금의 AAA급 게임들이 왜 현재의 디자인을 채택했는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RPG의 역사와 더불어 WRPG vs JRPG 논란에 대해 한 번쯤은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 논란의 흐름을 읽다 보면, 한국의 정당정치와도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워 게임과 TRPG
RPG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워 게임(war game)에 대해 알아야 한다. RPG의 원조격이라 부를 수 있는 TRPG가 이 게임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워 게임이란 쉽게 말해 ‘어른들의 전쟁놀이’다. 플레이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공터에 모여 콘셉트에 맞게 의상을 갖춘 후 모의 전쟁을 벌이는 놀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워 게임은 공간, 시간, 비용 등의 제약이 컸다.
출처는 게임메카. TRPG의 초석을 세운 게리 가이각스(좌)와 데이브 아네슨(우) 워 게임에 크게 영향을 받은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게리 가이각스와 데이브 아네슨이었다. 둘은 명실상부한 워 게임 마니아였다. 마음이 맞았던 둘은 기존의 워 게임과 다른 오리지널 워 게임의 개발에 착수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체인메일 : 블랙 무어 캠페인>이었다. 이 게임이 기존의 워 게임과 달랐던 점은 특정한 파티나 군단 같은 다수의 캐릭터를 운용하던 기존 워 게임과 달리 캐릭터 하나에 몰두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플레이어가 직접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고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는 ‘Role Playing’의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것이다.
<체인메일> 이후 가이각스와 아네스는 합작하여 1974년, 최초의 TRPG이자 모든 RPG의 조상이라 부를 수 있는 <던전 앤 드래곤(Dungeon & Dragon)>(이하 D&D) 룰 북을 출간했다. 이 게임은 판타지 세계에서 플레이어가 만든 캐릭터를 가지고 모험을 펼치는 RPG의 개념을 정립했다. 현대 게임에서도 사용되는 레벨, 체력(HP), 마력(MP) 등의 보편적 파라미터도 D&D의 업적이다.
D&D에서 플레이어는 게임의 마스터(GM)가 마련한 세션에 따라 정보를 수집하고 역할을 수행한다. 괴물을 만나면 주사위를 던져 정해진 규칙대로 데미지를 주고 받는다. 던전을 탐사하며 공주를 구하는 백마탄 왕자가 되거나 용을 물리치는 등 모험을 진행해 나간다. 여기서 기존 워 게임과 다른 건 하나의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롤플레잉 게임만의 특징이었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분신 캐릭터를 통해 세상을 상상하여 직접 이야기를 주도한다는 것.각1) 이 전통은 초기의 CRPG에서 훌륭하게 계승되어 현재까지도 나름대로 그 명맥을 잇는 경우가 많다.
총 3권 1세트로 발매된 D&D는 워 게임 마니아를 넘어 일반인 사이에서도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흥행에 성공하여 전 세계에 RPG라는 개념을 알렸다. D&D를 통해 워 게임의 높은 진입장벽은 한층 낮아졌다. <반지의 제왕> 이후 시들하던 판타지 문화는 게임이라는 형태로 재조명되었다.
서양 RPG의 양대산맥 - 위저드리와 울티마
RPG의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어디선가 한 번쯤 3대 RPG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중에서 <울티마>(이하 울티마) 시리즈와 <위저드리>(이하 위저드리) 시리즈는 항상 들어가는 반면 나머지 하나는 <마이트 앤 매직>, <바즈테일>, <웨이스트랜드> 등이 경합하곤 한다.
3대 RPG의 마지막 한 자리를 두고 경합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게임으로서 하나의 형식을 규정하고, 후대에까지 크나큰 영향을 미쳤던 울티마와 위저드리 같은 명확한 특징이 없기 때문이다. <마이트 앤 매직>은 울티마와 위저드리의 형식적 특징을 빌려오고 양적으로 늘렸을 뿐 그 자체의 오리지널리티는 거의 전무한 게임이었다. <바즈테일>과 <웨이스트랜드>는 울티마와 위저드리가 가지지 못했던 TRPG의 ‘규칙’ 부분에 집착한 게임이지만, TRPG를 CRPG로 구현하는 데 집중했을 뿐 TRPG와 구분되는 CRPG만의 새로운 형식적 특징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마이트 앤 매직>, <바즈테일>, <웨이스트랜드>와 같은 게임들은 게임의 역사에서 잊혀서는 안 될 명작들이며 2021년 현재에도 비견할만한 작품이 그리 많지 않은 훌륭한 게임들이다. 하지만 TRPG에 영향을 받았음에도 TRPG와 명확히 구분되는 CRPG만의 특징을 만들어내고 형식을 정의한 울티마와 위저드리만큼의 영향력은 없다는 것만큼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3대 RPG의 나머지 한 자리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것이다. 3대 RPG라는 말이 그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이유다. 그러므로 울티마와 위저드리, 이 두 게임을 놓고 양대 RPG라는 말을 쓰는 편이 좀 더 논의를 진행하기에 용이할 것이라고 판단된다.
1) 던전을 정의한 위저드리
첫 번째로 다뤄볼 게임은 게임에서 던전을 정의했던 위저드리다. 1인칭 시점에 격자형의 미로였으며 동-서-북의 3방향으로만 이동할 수 있었다. 남쪽으로 가려면 동이나 서로 시점을 돌려서 뒤로 돌아가는 식으로 이동이 가능했다. 전투 시 파티는 6명까지 구성이 됐으며, 적과의 전투를 시작할 시에 캐릭터의 위치에 따라 공격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달라졌다. 캐릭터를 생성할 경우 만들 때마다 랜덤으로 부여되는 능력치 보너스를 분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마을과 던전이 따로 존재했으며, 마을과 던전을 왕복하며 보급품을 보충하고 던전을 탐색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게임의 규칙이고, 위저드리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형식적인 특징들을 살펴보자.
1-1) 복잡한 미로와 함정, 오토맵의 부재
위저드리 1(본인은 도스박스 버전으로 플레이했다)에서 던전에 들어갔을 때 보여주는 격자형 1인칭 시점(좌)과 던전 1층의 지도(우)(던전의 지도 출처는 구글링) 던전의 모든 층은 20x20의 작은 타일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구조는 매우 복잡했다. 게다가 오토맵의 부재로 인해 일일이 모눈종이에 맵을 그려가면서 플레이했다. 웹진 닌자크리틱의 자료에 따르면, 오토맵의 부재는 단순히 기술력의 한계로 인해 제공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오토맵의 부재로 인해 위저드리 특유의 함정들이 의미를 가지게 됐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위험한 미로형 던전을 추구했던 위저드리 게임 디자인의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다. 가령 위저드리에서 악명 높았던 플레이어의 방향을 꼬아버리는 방위 함정을 보자. 이 함정에 걸리면 북쪽을 향하던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동쪽이나 남쪽 등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지만, 시점에는 변화가 없다. 이 시점의 변화가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위저드리 특유의 그리드 1인칭 시점과 결합하여 더없이 혼란을 가져다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오토맵이 있는 경우, 플레이어의 방위가 바뀌었다는 걸 시각적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이 함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도상에서 캐릭터의 방향이 바뀌어 있는 모습을 보고 그에 맞춰 캐릭터를 움직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오토맵이 없는 경우 어떤 방향으로 방위가 바뀌었는지 모르므로 플레이어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굉장히 혼란스러워진다. 따라서 이 함정은 오직 오토맵이 없을 때만 게임적으로 의미가 있는 함정이 된다. 그 외에도 맵의 다른 지역으로 강제 텔레포트를 시키는 텔레포트 함정, 앞이 전혀 보이지 않고 마법을 통해서도 밝힐 수 없는 다크존 등은 오직 오토맵이 없는 경우에만 게임 내에서 강력한 난관으로 작용하기에 오토맵의 부재는 위저드리 시리즈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게임적 요소 중 하나다.각2) 즉, 일부러 플레이어를 미로에서 헤매게 만들려는 의도로 제공되지 않았던 것이다.각3)
1-2) 캐릭터는 전략적 소모품일 뿐
위저드리 1의 로스터 화면, 필요한 만큼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캐릭터는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한 도구일 뿐 캐릭터성이라는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마을에서 얼마든지 무료로 새로운 캐릭터를 생성할 수 있다. 로스터를 짜는 것도 자유다. 각각의 캐릭터가 갖고 있는 서사는 없다. 게다가 캐릭터가 굉장히 쉽게 죽는다. 죽은 캐릭터를 부활시키려면 돈이 드는데, 그마저도 확률이라 실패할 경우 캐릭터는 재로 변하고 여기서도 실패하는 경우 해당 캐릭터는 영구적으로 소멸한다. 게임을 조금만 진행해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초반에 게임을 쉽게 진행하는 방식은 마을과 던전의 초반 부분을 왕복하면서 죽은 캐릭터는 그대로 놔두고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되, 레벨업에 성공한 캐릭터만 내버려 두고 따로 키우는 방식으로 게임을 진행하는 게 편리하다. 추가로 각 층마다 나오는 몬스터가 다르고 환경이 달라지므로 캐릭터 로스터 구성, 각자의 캐릭터가 맡는 역할 역시도 달라진다. 가령 파이터의 경우 초반에는 딜러를 수행한다. 스펠의 영향력이 크지 않아 전열 3열에 있는 파이터들의 공격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후열 3열은 물리 공격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가면서 아군의 메이지가 ‘MAHALITO, MOLITO’ 등의 광역 마법을 배우게 되면 주력 딜러의 역할이 메이지로 넘어가며 파이터는 탱커역할을 맡아야 한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 필요한 캐릭터, 내지는 캐릭터의 역할을 유연하게 바꾸는 식으로 게임을 진행해야 한다. 즉 이 게임에서 캐릭터는 게임을 끝까지 진행하고 엔딩을 보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하다.
1-3) 반(半) 영구적 죽음과 자원 관리, 수많은 RNG(Random Number Generator) 요소들
위저드리 1에는 세이브-로드가 제공되지 않는다. 게임을 종료하면 종료하는 시점에서 게임이 재시작된다. 캐릭터가 소모품인 이유도 반영구적 죽음에서 비롯되는 점이 없지는 않다. 캐릭터가 죽는다 해서 세이브-로드로 다시 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스펠은 D&D에 영향을 받은 게임답게 레벨별 마법마다 그 레벨의 마법 포인트를 소모하고, 다 쓰면 여관에서 휴식해 회복을 하는 방식이다. 메이지는 마법을 다 쓰면 전투에서 활약할 요소가 크게 줄어들기 때문에 마법 포인트를 항상 염두에 두고 던전을 탐험해야 한다. 게임에는 수많은 RNG 요소가 있으며 이 요소들 자체가 게임의 강력한 난관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던전 몬스터의 랜덤 인카운터뿐만이 아니다. 상대방을 공격할 때나 상대방의 공격을 피할 때도 적과 동일한 확률이 적용되고, 캐릭터가 레벨업을 했는데 운이 없다면 캐릭터의 능력치가 떨어지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이 확률까지 고려하여 로스터를 짜고, 어디까지 던전을 탐사하고 다시 마을로 돌아올 수 있을지를 철저하게 계산하면서 플레이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게임을 클리어할 수 없다.
2) 퀘스트를 정의한 울티마
두 번째로 다뤄볼 게임은 RPG에서 퀘스트와 오픈월드를 최초로 정립한 울티마 시리즈다. 이 글에서는 가장 유명한 울티마 4를 기준으로 삼아 게임의 특징을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플레이어는 게임을 시작하기 전 게임에서 준비해준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하고, 이에 맞춰 캐릭터의 능력치와 미덕이 결정되는 방식이었다. 동료는 최대 8명까지 데리고 갈 수 있었으며, 마법은 재료를 조합해서 사용하는 시약 시스템이 있었다는 게 게임의 기본적인 규칙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럼 이번에는 울티마 4만의 형식적 특징을 살펴보자.
2-1) 오픈월드와 레벨 스케일링
울티마 4의 월드맵 화면. 화면 속에 보이는 성 모양의 아이콘을 클릭하면 해당 마을로 들어가지는 오버월드 시스템을 차용했다.
위저드리가 좁고 밀폐된 하나의 던전을 탐사하는 걸 특징으로 한다면, 반대로 울티마는 엔딩 장소인 어비스의 던전과 몇몇 사원을 제외하고는 모든 장소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게임 역사상 최초의 오픈월드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대신 이 경우 강력한 괴물을 배치하게 되면 오픈월드라지만 강력한 괴물이 등장하는 곳에는 플레이어가 갈 수가 없기에 동선이 제한되는 한계가 생긴다. 때문에 울티마 4는 CRPG 최초로 레벨 스케일링 시스템을 도입한다. 플레이어 캐릭터의 레벨이 오를수록 등장하는 괴물도 동일하게 강해지는 방식이다. 다만 레벨 스케일링 시스템을 도입하면 아무리 레벨이 올라도 같은 수준의 괴물만 만나기 때문에 게임의 난이도 조절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게임 디자인 자체가 단조로워지기 쉽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단순하게 괴물이 강해지는 게 아니라 플레이어의 레벨에 따라 등장하는 괴물의 종류와 숫자로 난이도를 조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2) 대화 = 퍼즐
울티마 4의 게임 화면(왼), 네트워크 그물형 토폴로지(오)
울티마의 대화 시스템은 주관식으로 되어 있으며, name, job, bye 세 단어를 토대로 하여 NPC가 답변하는 내용에 따라 다시 필요한 키워드를 입력하는 방식이다. 대사 지문 외에도 따로 퀘스트로 인해 반응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해당 NPC와 관계없는 키워드라면 반응하지 않는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game이라는 단어를 치면 반응하지 않지만, job이라는 단어를 치면 반응한다. 여기서 NPC의 반응에 필요한 키워드를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화를 하면서 맥락에 맞는 단어를 찾아내는 것 역시도 플레이어의 역량에 달려있는 것이다. 상대가 무슨 키워드에 반응할지 모르기 때문에 해당 키워드를 알아내서 적절하게 써먹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게임 진행이 완전히 달라진다. 필요한 키워드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필요한 퀘스트를 수행하든, 정보를 아는 다른 NPC를 찾든, 매뉴얼을 읽든 스스로 자료를 찾아서 추론해야 한다. 게다가 필요한 키워드를 미리 아는 사람이라면, 정해진 순서에 따라 대화 키워드를 입력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해당 키워드를 바로 입력함으로써 원하는 답변을 바로 얻어낼 수도 있다. 따라서 울티마의 대화 시스템의 구조란 네트워크의 그물형 토폴로지에 가깝다.
2-3) 비선형 퀘스트
필자가 작성해본 울티마 4 저널의 일부분. 수집한 단서와 단어로 게임 속에 내재된 퍼즐의 정답을 추론하고 다음 행선지를 스스로 정해야 한다. 극히 일부분의 장소를 제외한다면 구현된 오픈월드 하에서 플레이어는 자유롭게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가령 울티마 4의 경우, 브리튼, 문글로우, 젤롬, 트린식, 유, 미녹 등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모든 마을에 갈 수 있다. 엔딩 장소에 가기 위해 얻어야 하는 8개의 룬, 8명의 동료를 얻는 순서도 정해져 있지 않다. 다만 엔딩을 향한 힌트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퀘스트를 해야 하므로 각 지역마다 흩어져 있는 개별적 퀘스트 수행 -> 아바타후드 획득 -> 엔딩 장소인 어비스의 던전으로 향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퀘스트의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고 플레이어는 자유롭게 어떤 퀘스트나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엔딩을 보기 위해 필요한 퀘스트가 무엇인지를 전략적으로 고민하여 그에 해당하는 퀘스트만 해도 된다는 뜻이다. 물론 필요한 퀘스트가 무엇인지는 게임 내에서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대부분의 퀘스트를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비선형 퀘스트에서 비선형이라는 말은 요즘 게임들처럼 단지 몇 개의 선택지를 주고 선택한 결과에 따라 결괏값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퀘스트를 얻거나 수행하는 과정 모두를 플레이어의 판단에 따라 비순차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시로 브리튼에서 ‘연민의 룬(rune of compassion)’을 얻는 퀘스트를 예시로 들어보자. 처음 브리튼 도시에 들어가 보면 한 거지가 자신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한다. 부탁을 들어주면 룬에 대한 힌트를 주는데, 이를 얻기 위해서 pepper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보라고 한다. pepper이라는 사람을 찾으면 이 연민의 룬의 위치에 대해 힌트를 준다. 브리튼 시 마을 끝부분을 찾아보라는 힌트다. 힌트에 따라 브리튼 시 가장 구석진 부분을 찾다 보면 연민의 룬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플레이어의 판단에 따라 거지를 만나지 않고 pepper에게 바로 힌트를 얻을 수도 있고, 아무 힌트도 없이 바로 연민의 룬을 찾을 수도 있다. 그건 플레이어의 재량에 달려 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고 플레이어의 판단에 따라 그 순서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게 비선형 퀘스트의 특징이다.
분석한 바와 같이, 울티마와 위저드리는 각자가 다른 방향으로 RPG 역사에 기여했지만 공통점도 있었다. 공통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우선 TRPG의 영향을 받아 직업과 성장의 개념이 존재했다. 각 게임에는 파이터, 프리스트, 메이지, 시프 등 여러 직업들이 존재하고, 직업마다 능력치와 가지고 있는 기술이 달랐다. 각 캐릭터들은 복잡한 던전을 돌파하거나 강력한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한 문제 해결용 도구로 사용됐다. 여기서 성장 개념이 들어가 레벨업을 시키거나 더 좋은 장비, 고급 마법 등을 갖추면 캐릭터들이 점점 강해져서 기존보다 수월하게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위저드리의 경우에는 대놓고 각 층마다 더 강한 적과 다양한 콘셉트의 적이 등장하기에 어느 정도 레벨 그라인딩이 강제되는 편이다. 반면 레벨 스케일링이 적용된 울티마의 경우에는 레벨업을 시킨다 하더라도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얻어낸 힌트를 통해 조합한 마법 내지는 더 좋은 장비를 갖춤으로써 게임 진행이 쉬워지는 것은 동일하다. 게다가 울티마와 위저드리 모두 동료와 파티의 개념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조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게임 진행이 수월해지거나 어려워진다는 특징이 있다. 가령 위저드리의 경우 파이터 6명으로 던전 1층부터 10층까지 전부 클리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 층마다 다양한 콘셉트의 적과 함정이 나오기 때문에 이를 파훼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탐색을 통해 전략적으로 파티원을 구성해야 게임을 진행할 수 있는 식이다.
출처는 https://ninja-critics.blogspot.com/2020/10/id-ch. <조크>는 탐색을 통해 알아낸 정보로 맵을 직접 그려가며 플레이해야 한다. TRPG가 울티마와 위저드리의 아버지라면, <조크>를 비롯한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은 그 둘의 어머니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서두에 언급했다시피 롤플레잉은 당대 조류를 가장 잘 반영하는 게임이었다. 80년대 울티마와 위저드리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PC에서 어드벤처 장르가 가장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웹진 닌자크리틱의 자료에 따르면 어드벤처 장르는 미지의 공간에 대한 탐색을 통해 단서와 도구를 수집하여 퀘스트 등 제시된 문제를 비선형적으로 해결하는 게임의 형식을 가졌다. 울티마와 위저드리 역시 어드벤처의 영향력을 받았고 어드벤처의 형식적 특징을 그대로 물려받았다.각4) 때문에 여명기의 RPG는 롤플레잉-어드벤처 게임으로 분류되었으며 사실상 둘은 거의 같은 게임으로 여겼다. 울티마의 키워드 대화 시스템, 위저드리의 은열쇠, 금열쇠와 같은 아이템처럼 게임 내에 존재하는 도구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서 내지는 해답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위 아이템들이 어떤 장소에서 사용되는지, 어떤 NPC와의 대화에서 사용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직접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알아내야 하는 퍼즐 형식에 가까웠다.
으른들(?)의 지적 유희, WRPG
귀납적 추론 능력을 물어보는 수능 문제의 예시. 이런 문제와 고전 WRPG 모두 정해진 규칙에 따라 시행착오를 통해 적확한 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메커니즘을 갖는다. 위저드리와 울티마는 게임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서를 숨겨두고, 시행착오를 통해 이를 알아내야 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 시행착오는 개별적인 단서들로부터 하나의 해답을 이끌어 낸다는 귀납적 추론의 방법론이다(굳이 귀납적 추론이 아니더라도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풀 수 있는 퍼즐도 있기는 하다). 문이과를 통틀어 교과서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괴롭히던 그 귀납적 추론 능력을 묻는 문제와 고전 WRPG의 메커니즘은 비슷한 점들이 많다. 재미를 느끼는 요소도 고난도 수학 문제나 추리 문제를 혼자서 풀었을 때와 같다. 학창 시절 수능 공부를 할 때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면서 끙끙 앓다가 결국 자기 힘으로 풀어내었을 때, ‘아하!’라는 깨달음과 함께 강렬한 지적 쾌감을 느껴본 적이 있지 않은가? 고전 WRPG가 추구하던 재미란 이런 수학 문제를 푸는 재미와 매우 유사하다. 때문에 고전 WRPG는 게임 내의 단서를 샅샅이 찾아낼 수 있는 관찰력과 꼼꼼함, 수집한 단서를 통해 정답을 유추할 수 있는 추론력과 사고력을 요구했다. 게임은 수학적 논리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퍼즐이자 추리 게임이었다. 애초에 게임에서 나오는 퀘스트(Quest)의 어원은 탐구, 탐색을 뜻하는 영어 단어이고, 파생된 단어인 Question은 의문을 뜻한다. 게임 속 자료와 단서를 탐색하고 탐구하여 문제(의문)를 풀라는 의미다. 괜히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이 교육계를 비롯하여 여타 분야에서 화두가 되는 게 아니다. 게이미피케이션에서 사용되는 ‘규칙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메커니즘’은 게임의 본질이자 핵심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고전 WRPG는 매우 어렵고 복잡한 게임이었다. 과거에는 게임이 단순했으며,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복잡해졌다는 사람들의 통념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 시대의 게임들을 진지하게 해보고 분석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다. 오히려 게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규칙의 측면에서는 2021년에 나온 현 게임들보다 과거의 게임들이 훨씬 하드코어하고 복잡한 메커니즘을 지녔다. 이러한 문제 해결 방식은 소수의 마니아들에게 강렬한 도전이자 특별한 경험으로 작용했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거대한 진입장벽을 세웠다. 위 게임들이 후대 게임들에게 무척이나 많은 영향력을 준 게임사(史)의 ‘고전(classic)’임에도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WRPG가 복잡하고 어렵게 디자인된 이유는 타깃으로 삼는 플레이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80년대에 두 게임을 비롯하여 롤플레잉과 어드벤처 게임이 유행하던 당시의 PC(Personal Computer)는 매우 고가의 물건이었다. 집에서 PC를 갖고 있는 대중은 거의 없었다. 소위 화이트칼라가 아니면 소유할 수 없었던 물건이 PC였다. 따라서 PC로 게임을 접할 수 있는 사람도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PC로 게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물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지적인 능력도 갖춘 중산층 이상의 성인들이 대다수였다. 그들을 만족시켜주기 위해서는 복잡한 메커니즘을 갖춘 게임들이 필요했다. 당시의 롤플레잉과 어드벤처 게임들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했다. 롤플레잉과 어드벤처 게임이 PC'로만' 발매됐다는 사실이 강력한 근거다. 부족한 것 없이 사는 화이트칼라들이 게임 내에 있는 복잡한 퍼즐과 추리 문제를 풀면서 지적 유희를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게임이었던 것이다.각5)
종합하자면 WRPG는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에 집중한 게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게임 상에서 정해진 목표와 던전, 퀘스트, 몬스터의 종류 등 정해진 게임의 규칙과 구성 요소들은 존재하지만, 정해진 내러티브의 몫은 적은 편이다. 플레이어를 강제로 이끌어가진 않지만, 알려주는 것 역시도 너무나 적다. 주어진 난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는 철저하게 플레이어의 자율에 맡긴다. 탐색과 탐구를 통해 정보를 얻어내지 못한다면 플레이어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시행착오의 과정은 플레이어마다 다르다. 사람은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게임하는 방식, 게임 플레이 실력, 목표를 이루어나가는 과정 등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 2부에서 계속
(참고문헌은 하나의 챕터가 끝날 때 한꺼번에 첨부합니다.)
각1) 후술하겠지만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는 특징'은 매우 중요하다. 소설이나 영화처럼 정해진 이야기를 감상하거나 해석하는 게 아니라 플레이어가 직접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기-승-전-결을 갖춘 기존 모더니즘 문학의 이야기 구조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를 중요시한 것이다. RPG에서 정해진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많은데,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를 정해진 이야기로 오인하는 경우로 추정된다. '내러티브'라는 다의적 의미를 가진 단어를 하나로 혼용하기 때문에 생겨난 오류다.
각2) 마지막 시리즈였던 위저드리 8에서야 오토맵이 구현됐는데, 위저드리 8의 경우에는 기존 위저드리 시리즈와 달리 던전의 구조를 단순화시킨 대신 전투에 더욱 집중을 하는 방식으로 디자인의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각3) 플레이어를 일부러 헤매게 만들려는 의도는 게임이라는 매체를 플레이어와 개발자 간의 경쟁 내지는 플레이어에게 주고자 하는 도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부분은 게임을 바라보는 철학의 차이이고, 게임에 대해 갖고 있는 전제의 차이다. 자세한 분석은 본 책의 후반부에 서술할 예정이다.
각4) 어드벤처의 비선형적 문제 해결의 형식을 끌고 온 것은 맞지만, 애초에 TRPG의 역할 수행 자체가 비선형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정해진 룰북에 따라 마스터 재량 하에 역할을 수행하며 자유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건 어드벤처나 TRPG나 동일하다.
각5) 오락실 아케이드 게임을 예시로 들며 반박할 수도 있다. 콘솔 시장과 PC 시장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 당대 콘솔은 오락실이 유행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대중들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반면, PC는 대중들이 살면서 한 번 보기조차 어려운 물건이었다. 물론 기술적으로도 콘솔이 PC보다 월등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실시간 액션의 구현이 PC에서는 불가능했다는 점, 대신 PC에서는 키보드를 활용한 풍부한 상호작용이 가능했던 점 등 PC와 콘솔의 게임 구현 환경이 달랐던 점도 PC에서 롤플레잉과 어드벤처 게임이 유행했던 이유 중 하나지만, 두 가지 요소 모두의 이유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콘솔과 PC 게임 시장이 본격적으로 합쳐진 시기는 PC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며 등장한 게임인 <둠>(1993) 이후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전까지만 해도 PC와 콘솔은 같은 비디오 게임으로 묶였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용어설명
AAA급 게임 : 업계에서 편의상 부르는 게임의 분류. 대형 게임사가 대량의 자본을 투자하여 주로 멀티플랫폼으로 발매하고, 수백만의 판매량을 기본으로 기대하는 게임을 말한다. 물론 막대한 양의 홍보 또한 포함된다. 즉 게임계의 블록버스터 영화라고 보면 된다.
WRPG(Western Role-Playing Game) : 서구권, 보통 유럽이나 북미산 롤플레잉 게임을 뜻한다. 여기서 WRPG와 JRPG를 분석하는 것은 당시 게임들이 유사한 경향성을 갖추고 있었기에 대표성을 띄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JRPG(Japanese Role-Playing Game) : 일본에서 제작된 RPG를 뜻한다. 나머지는 WRPG와 동문.
던전(Dungeon) : 게임 내에 괴물과 함정이 우글거리는 특정한 장소를 뜻한다. 보통 동굴이나 지하감옥 등이 던전의 주 무대가 되지만, 다른 배경을 던전의 무대로 삼을 수도 있다.
RNG(Random Number Generator) : 난수 발생기의 영단어를 줄인 말로, 주로 사용되는 지역 역시 북미. 단위 혹은 수치에 의한 무작위 요소가 있는 게임을 할 때 많이 쓰인다. 상대방을 공격할 시에 빗나갈 확률 등 게임 내에 존재하는 모든 무작위 요소를 지칭한다고 이해하면 편하다.
랜덤 인카운터 : 게임 속 무대를 돌아다니다가 만나게 되는 요소들이 랜덤하게 결정되는 상황을 뜻한다. 보통 게임 속 괴물이 무작위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을 뜻한다.
오픈월드 : 게임의 형식 중 하나. 오픈 월드의 기준은 다소 모호한 점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이동의 자유를 전제로 하여 게임 내에 있는 대부분의 장소로 갈 수 있도록 디자인한 게임을 뜻한다.
레벨 스케일링 : 플레이어 캐릭터의 레벨에 비례하여 자동적으로 적의 레벨이나 강함을 상승시키는 시스템을 뜻한다.
오버월드 : 거대한 월드맵에 개별 장소(마을, 건물, 동굴 등)를 아이콘으로 표시하고 플레이어 캐릭터는 그 아이콘에 접촉하는 것으로 개별 장소로 진입하는 디자인을 뜻한다.
네트워크 토폴로지 : 컴퓨터 네트워크의 요소들(링크, 노드 등)을 물리적으로 연결해 놓은 것, 또는 그 연결 방식을 말한다.
레벨 그라인딩 : 흔히 레벨 '노가다'라고 부르는 작업으로, 캐릭터의 레벨을 올리기 위해 괴물을 사냥하거나 캐릭터의 경험치를 올려주는 특정한 임무 등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행위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