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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 없는 자 Jan 05. 2022

게임의 접근성과 게임을 '보는' 행위

GG(Game generation) 3호를 비판한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 뜨거운 감자가 된 주제가 있었다. 이지(easy) 모드로 게임을 플레이하면 진엔딩을 볼 수 없어도 되는 지에 대한 논란이었다. 찬반은 갈렸다. 이지 모드로 진엔딩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게임을 구입한 소비자인 이상, 게임 내에 있는 고정된 내러티브의 영역(정해진 스토리)는 전부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대인 사람들은 진엔딩 역시도 개발자가 플레이어에게 주는 보상이고, 진엔딩을 향해 플레이해나가는 과정은 개발자가 의도한 체험이다. 의도된 체험을 훼손시키면서까지 이지 난이도를 추가하여 진엔딩을 보게 해줘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위 논쟁은 단순한 난이도 논란을 넘어 게임의 접근성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오늘은 난이도를 넘어선 게임의 접근성, 더 나아가 '보는 게임'현상에 대해서까지 이야기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난이도 = 접근성?


난이도와 접근성 사이의 관계가 아주 없지는 않다. 게임이 쉬울수록 상대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게임의 엔딩을 보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게임의 엔딩을 본다는 말의 의미는 어찌됐든 간에 게임의 끝을 본다는 말이고 게임 내에 존재하는 대다수의 콘텐츠를 스스로의 능력으로 즐길 수 있다는 말이다. 게임 내 대부분의 콘텐츠를 플레이어 스스로의 능력 하에 즐길 수 있으니 한 번 게임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쉬운 난이도가 접근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접근성은 난이도의 높낮이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만큼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난이도가 높은 게임이 오히려 접근성은 높을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난이도 조절은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수많은 수단 중 하나일 뿐 그 자체가 접근성과 동일시되는 개념은 아니다. 접근성이란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더 많은 사람들이 해당 게임을 즐기기 위한 게임의 모든 요소를 통칭할 수 있는 말이라고 뭉뚱그릴 수 있다. 사람들이 게임의 규칙을 얼마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지, 조작이 얼마나 편리한지부터 시작하여 게임에 들어가는 시간,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들어가는 에너지까지 여러 요소가 혼재된 개념이다.


필자는 접근성을 미시적 관점과 거시적 관점으로 나누어 보려고 한다. 미시적으로는 혐오 표현 필터링, 자막 모드 지원, 멀미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화면 흔들림, 카메라 끄덕임과 같은 옵션, 운동 장애, 시각 장애, 청각 장애 등 장애인을 위한 각종 기능(색약 모드 지원이라든지,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음성 지원 등) 들이 있을 것이고, 게임의 규칙을 설명해주는 매뉴얼, 편의성을 늘려주는 퀘스트 마커 등의 옵션 등 이 모든 것이 게임의 접근성을 높여주기 위한 좋은 옵션이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게임을 플레이 할 수 있느냐를 넘어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인해 게임을 플레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고려하는 기능을 포괄하고 있느냐로 본다.


거시적으로는 해당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이 소요되는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지게임을 플레이하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해당하는 요소를 포함한다. 규칙의 복잡성, 게임 진행에 요구되는 각종 지식의 수준 등 모든 요소가 게임에 접근하기 위해 들여야 할 시간과 에너지에 포함된다. 가령 근래 나온 게임들 중 필자가 최악의 접근성으로 뽑는 게임 중 하나인 CRPG <패스파인더 : 의인의 분노(2021)>는 D&D 변형 규칙인 패스파인더 규칙을 거의 그대로 가지고 와서 게임 규칙에 대한 매뉴얼만 무려 1004페이지에 달한다. 물론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서 다 읽어볼 필요는 없고 필요한 부분만 따로 떼서 읽어도 되지만 감안하더라도 매우 복잡한 규칙과 D&D에 대한 각종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거시적 관점에서 접근성을 바라본다면 난이도 역시도 게임의 접근성과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난이도가 쉬울 수록 게임에 들어가는 시간과 에너지의 소모가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분량을 가진 게임이라도 난이도가 어렵다면 그만큼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투자해야 할 것이므로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것도 완전히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난이도라는 개념은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사람마다 느끼는 난이도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평생동안 단 한 번도 게임을 플레이해보지 않은 70대 노인이라면 아무리 게임에 이지 모드를 추가한다고 치더라도 게임을 클리어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게임의 장르가 플랫포머 같은 장르라면 해당 레벨의 디자인에 따라 타이밍에 맞춰 점프를 입력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아무리 난이도를 낮춰도 게임에 접근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상호작용이라는 전제를 향한 도전


어떤 게임 개발자는 이지 모드를 도입하느니 차라리 치트/유람 모드를 도입하는 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같은 게임을 플레이하더라도 난이도는 상대적이기에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쉬워서 플레이하는 내내 지루한 반면 다른 누군가는 반드시 게임을 클리어하지 못하고 포기하기 때문이다. 이 지적은 매우 시의적절하며 정확한 통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람 모드라는 것은 돌아다니면서 게임을 '구경'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며 플레이어의 직접적인 입력이 거의 필요가 없다. 플레이어의 직접적인 입력이 없이도 자동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자동 모드도 유사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유람/자동 모드는 플레이어가 직접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 아니라 AI에 따라 게임이 진행되는 걸 '보는' 개념에 가깝다. 즉,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기 위한 기본 전제인 입력하는 행위를 포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게임이라는 매체가 갖고 있는 치명적인 한계점이 드러난다. 게임은 상호작용을 통한 체험과 상호작용에 의미를 부여하는 규칙의 매체다. 플레이어가 해당 게임의 내용과 구조에 입력을 가하고 입력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게임이 진행된다는 것은 분명 다른 매체가 지니지 못한 차별점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상호작용을 하려면 플레이어가 직접 컨트롤러를 잡고 게임이 내보내는 특정 신호에 따라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입력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입력은 매우 피곤한 행위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 매체와 비교해보자. 한 번 틀어놓으면 해당 영상이 끝날때까지 아무런 입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시청자는 그저 동영상을 켜놓고 누워서 편하게 보면 된다. 하지만 게임은 어떤가? 게임이 진행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게임이 내보내는 신호에 따라 무언가를 입력해야 한다. 입력하지 않으면 게임이 진행되지 않는다. 워킹 시뮬레이터같은 관광 게임조차 최소한의 입력을 요구한다. 상호작용은 게임의 대전제이기도 하지만 게임 내부에 존재하는 텍스트와 상호작용하기 위해서 컨트롤러를 잡고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입력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피로감이 있는 것이다. 나이 먹고 나니 힘들어서 게임을 플레이하지 못하겠다는 말이 종종 들리는 건 괜한 엄살이 아니다.


따라서 게임의 접근성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게임의 대전제인 상호작용에 대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상호작용은 게임의 대전제이기도 하지만 그 특성상 일정한 수준의 진입장벽을 세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튜브로 타인의 게임 방송을 보거나, E-스포츠 등 게임을 보는 행위가 주목받고 있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얼마 전 게임 제너레이션(Game Generation, GG)이라는 게임 전문 웹진에서 게임을 본다는 행위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이유가 있다.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보는 것도 게임의 일부라는, 게임의 접근성을 높인다는 명분 하에 상호작용이라는 게임의 대전제가 도전받고 있는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필자는 어느 지인에게 <둠 이터널>의 게임 플레이 동영상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시청 소감은 간단했다. 스트레스 풀기 좋은 게임 같다는 것이었다. 해당 게임을 플레이하던 플레이어는 매우 솜씨가 좋은 실력자였고, 그런 실력자에게 악마들이 별반 저항조차 못하고 허무하게 터져나가니 그런 감상을 갖는 게 당연했다. 흔히 인터넷에서 말하는, 아무 생각 없이 악마들을 찢고 죽이는 게임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둠 이터널이 아무 생각 없이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은 아니다. 오히려 해당 게임의 난관에 맞서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게임에서 내주는 문제를 풀어내야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다. 둠 이터널의 거의 대부분의 몬스터에게는 유효한 약점이 존재하며, 매번 사용하는 무기를 바꿔가며 약점을 적극적으로 공략하지 않는다면 수없이 많은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가령 본 게임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헤비 악마인 아라크노트론의 약점은 머리 위 포탑이며, 원거리에서 미리 포탑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수없이 쏟아지는 플라즈마 포에 둠 슬레이어의 체력은 순식간에 줄어들 것이다. 얼음 폭탄을 사용하여 미리 프라울러를 얼리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플레이어의 곁으로 순간이동하는 프라울러의 모습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것이다. 하나의 아레나에서 전투하는 동안 수많은 적들은 플레이어를 끊임없이 압박하며, 아이템을 얻기 위해 다수 배치되어 있는 플랫포밍 난관도 아무 생각 없이 통과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둠 이터널은 스트레스를 풀기에 결코 좋은 게임이 아니다. 오히려 플레이어에게 극한의 스트레스를 주며 적극적인 도전을 요구하는 게임이다.


게임을 본다는 행위의 문제는 여기서 나타난다. 직접 해보지 않으면 해당 게임의 가치를 알 수 없는 점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왜곡되어 받아들여질 여지도 충분하다. 게임 방송이나 E-스포츠 플랫폼에 적합한 게임은 매우 한정적이다. 게임 플레이를 보는 것만으로는 게임의 가치를 알아보기가 지극히 어려운 게임들이 수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왜 E-스포츠와 게임 방송을 볼까? 게임을 보는 게 재미있기 때문이다. 왜 게임을 보는 게 재미있을까? 게임을 보는 행위가 어떤 요소든 간에 시청자들이 느끼는 재미와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반대로 뒤집어보면, 게임을 보는 행위가 재미없으면 사람들은 게임 방송을 시청하지 않는다. 적어도 어떤 흥미를 유발하는 수준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게임 방송을 본다.


물론 재미는 취향이다. 누군가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재미를 느끼지만, 누구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으면서 재미를 느낀다. 기실 재미라는 말은 취향이라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취향은 각자가 다르고 너무나 추상적이기에 함부로 정의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재미에 대해서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도전이지만 다행히도 칙센트미하이의 몰입 이론과 이 논리를 이어받아 재미 이론을 쓴 코스터는 사람들이 재미를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서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다. 소설의 내러티브, 음악의 선율, 스포츠 경기 등 모든 매체에서는 규칙에 따라 일정하게 전개되는 패턴이라는 게 존재하며, 이 패턴을 학습하면서 재미를 느낀다는 점이다.각1) 다만 패턴을 학습하기 위해서는 너무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중간 지점이 필요하다. 개인의 자아(自我, ego)가 학습해야 할 패턴이 너무 쉬울 경우 자아는 몰입 상태에서 벗어나 지루해지며, 반대로 과하게 어려운 난이도에서는 불안감에 빠져 학습 자체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위 논리를 따르자면 사람들이 재미를 느낀다는 것은 어떤 구조화된 패턴에 재미를 느낀다는 것이고 그 구조화된 패턴을 학습할 수 있어야 한다. 학습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난이도가 필요하다는 전제는 물론이다. 어떤 작가의 발언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들은 새롭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익숙한 걸 좋아하는 반면 정말 새로운 걸 갖다주면 싫어한다'는 주장도 적절한 난이도라는 개념과 맞물리면 정확하게 설명이 된다. 새로운 것이라는 말은 정말 이 세상에서 없었던 무언가가 아니라 스스로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을 의미하며,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학습의 난이도가 가파를 수밖에 없다. 새롭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는 이유도, 소설의 클리셰 비틀기처럼 기본적으로 본인에게 익숙한 무언가에 일정 부분 변주를 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완전히 새롭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그만큼 학습하기에 용이하므로 재미를 느끼기도 상대적으로 쉽다.


따라서 사람들이 게임 방송을 보면서 재미를 느끼고 그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게임 방송만으로 재미를 학습할 수 있는 게임에 한정된다. 보는 것만으로 시청자를 압도할만한 비주얼과 내러티브를 갖춘 영화같은 게임이라든지, 아니면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져서 해당 게임의 규칙을 파악할 필요가 없는 메이저 게임에 한정되는 것이다. 유명 게임 스트리머가 이름 모를 인디 게임을 방송할 때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메이저 게임을 방송할 때와 달리 시청자가 반의 반도 나오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직접 게임을 플레이해보지 않은 이상, 해당 게임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게임을 봐도 이해가 안 되며, 학습할 수도 없기에 재미를 느낄 수도, 가치를 알아볼 수도 없다는 의미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게임을 직접 해보더라도 해당 게임에 재미를 느낄 수 없고, 가치를 알아볼 수도 없을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할 지도 모른다. 어떤 인디 게임을 직접 해보더라도, 해당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취향에 안 맞을 수도 있고, 난이도가 너무나도 어려워서 재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너무나 쉬워서 싱거울 수도 있다. 직접 게임을 해보더라도 플레이해본 게임의 가치를 알지 못할 가능성은 존재한다. 특히 게임에서 난관의 존재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은 각자가 다를 수밖에 없고, 게임을 해보더라도 각 게임마다 해당 게임에 대한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질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직접 게임을 플레이해야 하는 이유는, 게임 기저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규칙과 시스템을 숙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규칙과 시스템을 알지 못한다면 대체 게임이 플레이어와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하는지 그 의미를 전연 알수가 없으며, 왜 이렇게 캐릭터를 움직여야 하는지, 특정한 방식으로 스테이지를 진행하는 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를 방송으로 보더라도 알 수 없다. 즉, 해당 게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아무리 유명한 게임 스트리머가 게임을 스트리밍 하더라도 인디 게임을 방송하는 순간 시청자가 반토막 이상 나버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게임을 직접 해보고 규칙을 파악한 상태라면 최소한 이 게임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 지 알 수가 있기 때문에 게임 방송을 보더라도 '패턴을 학습'하기가 훨씬 용이해진다. 취향이 갈릴 수는 있을지언정 받아들일 수는 있다는 것이다.


해당 게임의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특정 게임의 과소평가는 자연스럽게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게임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 지 알지 못하니 그저 초라한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기 쉽다. 특히 인터페이스가 불편하고 기술력이 낡은 고전 게임들, 인디 게임들은 시청자가 직접 플레이를 해본 적이 없는 게임들이 대다수이며, 해당 게임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기 때문에 게임 방송에서 재미를 느끼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슈퍼마리오처럼 누구나 알만한 명작 고전 게임이 아닌 이상 게임 방송을 시청하는 사람들은 그저 게임의 원시적인 겉모습만 보고 그래픽이 나쁘다든지, 인터페이스가 불편하다든지, 편의성이 부족하다든지 하면서 게임을 깎아내릴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상호작용이라는 대전제의 포기는 게임의 근간을 부정하는 행위다


필자는 이번 Game Generation 3호를 읽으면서 해당 웹진의 영문 모를 편향성을 읽었다. 분명 '보는 게임'이라는 주제는 상호작용이라는 대전제에 도전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마땅히 이에 따른 비판점도 균형있게 실려 있어야 함에도 해당 웹진은 그렇지 않았다. 게임을 보는 행위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그 한계점에 대해서는 제대로 조명해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웹진의 치우침이 크다고 느꼈다. 대충 상황은 이해할 수 있다. 웹진에 글을 싣는 필자 중 다수는 석박사 이상의 고학력 연구원들이다. 그렇다면 공부나 연구를 하느라 직접 게임을 플레이해볼 시간이 매우 부족할 것이라는 점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게임을 직접 해보는 것보다는 게임을 보는 행위를 좀 더 긍정적으로 평가해준 게 아닐까 싶은 의구심이 들었다. 게임평론가 이상우는 월드 플리퍼와 핀볼의 비유를 들면서 보는 게임을 다이어트 코크에 비유하기도 했지만, 보는 게임의 한계점을 직접적으로 지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소 미약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상호작용이라는 대전제를 포기한다는 말은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한 게임의 근간을 포기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상호작용의 매체였던 게임은 플레이어와 어떻게 하면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왔고, 상호작용에 의미를 부여하는 수많은 규칙에 변주를 주었다. 애초에 게임의 장르라는 말은 플레이어와 게임이 상호작용하기 위해 설정한 규칙 중에서 유사한 규칙을 가진 게임들의 묶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선 턴제와 실시간이라는 두 가지 축이 나뉘어졌고, 그 속에서 퍼즐, 어드벤처, 액션, 플랫포머, 시뮬레이션, 전략 등의 유사한 규칙을 지닌 다양한 게임 장르가 태어났다. 그렇게 플레이어와 게임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상호작용함으로써 지금까지 발전해온 것이다. 상호작용은 게임의 근간이자 타 매체와의 근본적인 차별점일 뿐만 아니라, 게임 이외에 그 어떤 매체도 이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월등하게 활용할 수 있는 매체는 없다. 즉, 상호작용은 게임의 근간일 뿐만 아니라 게임의 정수(精髓)인 셈이다. 상호작용이 게임의 근간이 되지 못한다는 주장은 상호작용에 의미를 부여하는 규칙을 포기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기 위해 지금까지 발전해온 게임 장르와 형식 전부를 부정하는 주장과 진배없다.


보는 게임의 시대는 게임을 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게임만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게임들의 과소평가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기술력이 발전하면서 영화같은 게임이 과하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시점에(특히 Game Of The Year, GOTY는 이러한 경향이 심한 편이다), 보는 게임의 가치를 조명하고 게임을 하는 행위를 경시한다는 것은 게임이 영화와 같은 어떤 영상물과 유사한 매체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불안함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점점 플레이 위주의 게임들 가치는 하락할 가능성이 높고, 반면 게임을 영상으로 접한다는 것은 영화와 게임을 거의 동일시한다는 점, 결과적으로 게임이 영화의 하위호환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까 싶은 불안함이 있다. 에스펜 올셋, 마르쿠 에스켈리넨과 같은 루돌로지 학자들이 문학과 서사학의 영역 침범을 두고 매체에 대한 일종의 식민주의적 침략으로 보았듯이, 영화와 같은 영상물이 게임의 영역을 침범하는, 또 다른 방식의 영역 침범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소강상태에 접어든 지 오래인 제 2차 루돌로지 vs 내러톨로지 논쟁이 일어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상호작용이라는 특징은 더 많은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진입장벽이 되는 건 사실이다. 윤태진 교수가 지적하듯이, 게임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플레이어는 점점 더 주변화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것이다. 특정 분야에 진지하게 몰두하고 해당 분야의 가치를 파고드는 사람은 어느 시대에서나 소수였다. 영화를 사랑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시네필이 소수인 것과 마찬가지다.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방치형 게임, 워킹 시뮬레이터와 같은 관광 게임, 더 나아가 게임을 보는 행위의 가치를 전연 무시할 수는 없으나 그건 현실이 어렵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받아들이는 대승적 차원의 타협에 불과할 뿐이다. 대중성이 부족하고, 다수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근간 자체를 바꿔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끝.


참고문헌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이희재 역, 2005,『몰입의 즐거움』, 해냄출판사.

라프 코스터, 유창석, 전유택 역, 2017, 『라프 코스터의 재미 이론』, 길벗.

Aarseth, Espen, 2004, “Genre Trouble: Narrativism and the Art of Simulation,” First Person: New Media as Story, Performance, and Game, Noah Wardip-Fruin and Pat Harrigan (eds.), Cambridge, MA: The MIT Press.

Eskelinen, Markku, 2004, “Towards Computer Game Studies,” First Person: New Media as Story, Performance, and Game, Noah Wardip-Fruin and Pat Harrigan (eds.), Cambridge, MA: The MIT Press.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1&match=id:59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1&match=id:60

https://twitter.com/FatswallowF/status/1471380951410569218


각1) 스포츠에서는 고정된 흐름이 없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지만, 경기장에서 경기를 뛰는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정해진 규칙 하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학습할 수 있는 패턴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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