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름없는 자 Oct 25. 2022

반지성주의자가 된 나

여덟 번째 게임, 레플리카

소재 : 정치/사회적 소재로 인해 정치적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음

접근성 : PC, ios, 안드로이드 전부 가능. 익혀야 할 규칙도 별로 없다. 접근성은 좋은 편.

시간 소비 및 중단 가능성 : 추리 요소를 얼마나 빨리 푸는지에 따라 다르다.

체감 난이도와 벌칙 : 난이도 편차가 큰 편.


게임 내러티브에는 오해가 있다. 미리 만들어진 각본이나 시나리오, 캐릭터가 훌륭하면 좋은 내러티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내포하여 진지하게 생각할 여지를 주는 게임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종합하면 게임 내부에 고정된 '텍스트'가 뛰어나면 좋은 내러티브라고 생각한다. 기존 소설이나 영화, 만화 같은 매체의 독자나 관객들은 일반적으로 내러티브라는 단어를 그렇게만 받아들이니, 응당 게임에서도 같을 거라고 생각한다.

 

매체의 차이점을 염두에 두지 않아 발생한 오해다. 게임은 플레이어가 진행하는 것이고, 플레이어가 직접 진행하지 않는 프로그램은 그저 코드 덩어리에 불과하다. 수용자인 플레이어가 게임과 상호작용하면서 진행해나가는 과정은 각자가 다르며 그 자체로 하나의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가령 똑같이 <엘든 링>을 플레이하더라도 게임의 전 지역을 구석구석까지 훑어보는 플레이어와 엔딩만을 향해 달려가는 플레이어는 게임 내에서 겪는 경험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만큼 게임 내에서 구성되는 내러티브도 다르다. 소설과 영화 같은 기성 매체와 내러티브의 성격이 다른 이유는 여기서 비롯된다. 좋은 게임 내러티브란 텍스트의 질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수용자인 플레이어와의 결합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오늘 언급할 퍼즐/추리 어드벤처 게임 <레플리카>(이하 레플리카)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레플리카>의 인게임 스크린샷


게임을 시작하면 플레이어는 국가안보부에 감금되어 있는 체로 게임을 시작한다.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건 갇힌 방 안에 놓여있는 스마트폰을 조작하는 일뿐이다. 스마트폰은 테러리스트로 의심받는 옆방에 갇힌 누군가의 것이다. 반대로 옆방에 갇힌 누군가는 플레이어의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 서로의 스마트폰을 바꿔 든 상황 속에서 플레이어는 상대방의 스마트폰을 뒤지며 상대방이 테러리스트라는 증거물을 찾아야 한다.

   

레플리카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은 플레이어가 처한 상황 속에서 나온다. 스마트폰을 해킹하여 증거물을 찾는 과정(게임 플레이)과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가 처한 상황이 동일하게 겹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에서 반체제 증거를 찾으면 찾을수록 국가안보부에서 전화가 걸려오고, 플레이어는 칭찬이라는 보상을 받는다.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게임이 즉각적으로 반응해주는 좋은 상호작용 시스템을 지녔다. 게임 플레이와 텍스트 사이의 거리가 극히 가까운 게임이고 둘 사이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레플리카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게임이다. 게임 플레이와 긴밀하게 결합된 텍스트 속에서 플레이어는 개발자가 만들어낸 신랄한 풍자와 더불어 강렬한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즐길 수 있다.


게임의 메시지는 엔딩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각기 다른 텍스트를 지닌 엔딩이 12가지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임의 텍스트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회차 플레이를 해야만 한다. 엔딩을 본 이후에도 미처 풀지 못했던, 내지는 놓쳤던 단서들을 찾아 나가는 과정은 일종의 퍼즐 풀이에 가깝다. 플레이어는 퍼즐을 풀면서 새로운 엔딩을 본다. 기존에 보았던 엔딩과 비교해가며 개발자의 메시지를 알아낸다. 그 과정 속에서 플레이어는 ‘레플리카(복제품)’라는 게임의 제목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이 게임이 단순한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불과한 게임이 아닌 이유이며, 개발자가 게임만이 표현할 수 있는 내러티브 방식을 충분하게 고민하고 게임을 디자인했다는 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래서 레플리카는 좋은 게임일까. 개인적인 소감을 조심스럽게 말해보자면 조금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게임의 메시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다회차를 필수로 요구하는 게임인데, 다회차 플레이를 하면서 요구하는 퍼즐 풀이에서 치명적인 결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모스 부호 퍼즐이나 16진수 퍼즐을 들 수 있는데, 위 퍼즐들의 문제는 게임 내에서 해당 퍼즐들이 모스 부호인지, 16진수인지 알아내기가 지극히 힘들다는 점에 있으며, 배경지식이 없이는 도저히 게임 내에서 풀이 방법을 알아낼 수 없다는 것도 이 게임의 단점이다. 해당 퍼즐들이 하나의 이스터에그에 불과한 게 아니라, 게임의 메시지를 알아내기 위해 다양한 엔딩을 보려면 필수적으로 풀어야 하는 퍼즐이기에 단점은 더욱 눈에 띈다.


다른 어드벤처 게임과 비교해보면 레플리카 퍼즐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근 수년 내에 발매된 퍼즐/추리 어드벤처 게임들을 사례로 들어 보자. <더 위트니스>의 한 붓 그리기, <몬스터즈 익스페디션>의 통나무 옮기기, <오브라딘 호의 귀환>의 회중시계로 인한 시간 여행 등. 퍼즐 요소가 강하면서도 좋은 어드벤처 게임들은 게임 전체를 지탱하는 하나의 통일된 핵심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게임을 진행하는 내내 하나의 메커니즘을 응용하고 확장하여 게임의 깊이를 늘려나가는 형식을 취한다각1). 진행하면서 어려운 퍼즐들이 나와도 게임 내적으로 존재하는 힌트만 가지고도 논리적으로 생각하여 충분히 풀 수 있게 만들어진 구조다. 잘 만든 퍼즐들은 많은 시간을 고민하다가 게임 내부적 힌트만으로도 기어이 풀어내었을 때 ‘유레카!’ 내지는 ‘아하!’라는 감탄사가 나온다. 배경지식이 없어도 좋은 퍼즐들은 얼마든지 많다.


모스 부호나 16진수 퍼즐을 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퍼즐을 내기 위해서는 게임 내에서 충분한 설명이 주어져야 한다. 해당 단어가 모스 부호인지, 16진수인지 알 수도 없고, 설사 어찌어찌 알아채더라도 16진수에서 A~F를 10진수로 변환하면 숫자 몇에 해당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혹여나 학창 시절에 16진수를 배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평소에 잘 쓰는 표기가 아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잊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게임 내에서 해당 퍼즐에 대한 배경지식을 알아낼 방법이 없으면 인터넷 검색으로 퍼즐을 해결해야 한다. 다회차를 진행하면서 유일하게 ‘게임 플레이’라고 부를만한 영역이 퍼즐을 푸는 부분 말고는 없는데, 퍼즐 풀이마저 인터넷 검색으로 해결해버리면 이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라는 부분은 완전히 의미를 잃어버린다.


가령 모스 부호나 16진수 퍼즐을 내더라도, 처음부터 모스 부호와 16진수가 무엇인지를 게임 내에서 설명을 해준 다음, 다회차 플레이를 하면서 모스 부호든, 16진수든 이를 활용하고 응용한 기믹의 퍼즐들을 점진적으로 늘려나가는 식으로 게임을 디자인했다면 이 게임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게임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이 게임처럼 메시지가 중요하고, 메시지를 알아내기 위해 다회차 플레이를 강요하는 게임이라면 핵심적인 게임 플레이 파트인 퍼즐 풀이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게임의 뼈대가 되는 퍼즐이 부실하며 불합리적이다. 이 게임이 좋은 게임이라는 데에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운 이유다.


두 가지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모스 부호나 16진수 퍼즐은 게임에서 아주 일부분에 불과한 히든 퍼즐들이고, 주가 되는 게임 플레이 파트는 상대방이 테러리스트라는 단서를 찾아내는 과정이 아닌가? 맞는 말이다. 게임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부분은 단서를 찾고 추리하는 부분이 맞다. 다만 그런 관점이라면 게임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게임에서 단서를 찾는 부분이랍시고 내놓는 추리 파트는 대부분 아무런 생각 없이 클릭만 해도 클리어가 가능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어느 고등학교 출신인지, 집이 어디 있는지 등 그냥 사진첩만 들어가서 클릭만 몇 번 해도 바로 알아낼 수 있다. 처음 게임 시작할 때 문자가 날아오는 걸 읽고 스마트폰 열람 비밀번호 찾는 추리가 그나마 약간의 번뜩임이라도 필요한 정도다. 게임에서 존재하는 추리 파트는 첫 스마트폰 비밀번호 찾는 수준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 그 대단하다는 정치/사회적 메시지라는 것도 합리적인 게임 플레이가 뒷받침된 상황 속에서 플레이어가 주도적으로 게임의 난관을 해결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스스로 얻어내야 비로소 ‘게임’적으로 가치가 생기는 법 아닐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얼마 전 '심심한'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는 과도한 한자어라고 비난하면서 욕하는 사람들로 인해 반지성주의 논란이 일었던 것처럼, 모스 부호나 16진수 역시 평소에 잘 쓰이지 않는다고 해서 검색조차 해보지 않고 분노로 일관하는 건 동일한 맥락 아닌가. <페즈>나 <인스크립션>처럼 ARG요소가 들어간 게임들도 많은데 모스 부호나 16진수 정도면 풀 수 없는 퍼즐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이래서 개인적으로 ARG요소를 좋아하지 않는다). 모스 부호 퍼즐 같은 경우 모스 부호를 사용한 것과는 별개로 개발자가 상당히 공들여서 만든 퍼즐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 관점을 따르더라도, 퍼즐에 체계성이 없는 건 명백한 결함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잘 만든 퍼즐들은 하나의 통일된 메커니즘 하에서 기존 기믹을 응용하거나 추구하여 난이도를 점진적으로 올리는 형식이다. 퍼즐의 난이도가 어려울지언정 동일한 맥락 하에서 발전한 형식이기에 뜬금없이 등장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반면 레플리카에서는 추리 게임이라는 맥락과는 전혀 뜬금없는 퍼즐들이 주어지니 게임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구조가 아니라 파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게임의 구조적 차이점을 감안하지 않은 채 단순하게 검색을 하지 않은 나 자신의 반지성주의적 문제로 치환하려 한다면, 나는 기꺼이 반지성주의자가 되련다.


개인적으로 실망이 커서 오랜만에 비판적인 글을 썼다.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게임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나쁘지 않다. 이 게임만의 내러티브 표현 방식은 한 번쯤 참고해볼 가치가 있다. 미세한 컨트롤, 논리적 사고를 크게 요구하지는 않으니 짧은 소설책 하나 읽는다고 생각하면 편하긴 하다. 모바일 포팅도 잘 되어있고, 가격도 싼 편이니 내러티브 게임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플레이해볼 만하다. 오히려 캐주얼 게임이라면 이런 게임 플레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니까.


이런 분들에게 추천

내러티브 위주의 게임을 찾으시는 분

작품 내에서 생각할 만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걸 선호하시는 분


이런 분들에게 비추천

깊이를 가진 퍼즐/추리 게임을 원하시는 분

게임은 기본적으로 플레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


각1) 더 위트니스나 오브라딘 호의 귀환과 같은 경우 게임이 비선형적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에 단계별로 메커니즘을 응용하고 확장하는 게임은 아니라고 반론할지도 모른다. 선형구조로 짜인 게임이 아니기에 점진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나, 특정 퍼즐/추리가 너무 어렵다면 다른 루트로 돌아가서 쉬운 퍼즐들로 학습한 이후에 다시 돌아오면 풀 수 있는 구조(더 위트니스) 거나, 내지는 다른 승무원에 대한 단서들을 찾고 추리하는 과정 속에서 기존에 몰랐던 승무원의 운명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오브라딘 호의 귀환).


참고자료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16/11/1670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