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함과 좌절에 파묻힌 이들에게 건넬 수 있을 <당당한 염세주의자>
작가의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다. 염세철학가 라니.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내가 아는 염세란 단어의 이미지 때문일까, 이름만 들어도 왠지 삶을 비관하고 냉소적인 미소만 띠고 있을 나이 지긋한 누군가의 모습이 떠오르려고 한다. 노력과 좌절의 굴레 속에서 삶을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러게 노력을 하지 말지"라든가 "해봐야 어차피 안돼" 같은 힘 빠지는 소리를 할 것 같은 그런 사람 말이다.
실제로 염세주의라는 단어의 국어사전 뜻 자체도 그렇다.
세계나 인생을 불행하고 비참한 것으로 보며, 개혁이나 진보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경향이나 태도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별 기대 없이 눈길을 돌린 책 표지에는 조금 의외의 문구들이 적혀있었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마지막 태도", "휘둘리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는다". 그리고 "장자". 이런 것들이 염세주의의 정의와 연관이 있는지 긴가민가한 생각이 들었다. 궁금증에 조급해진 마음으로 넘긴 책장들에는 의외의 키워드들이 등장했다. 사랑, 자아, 성숙, 꿈, 순리, 우주 등, 염세주의자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의외인 것 같은 단어들이었지만 읽다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내용들이었다.
두 번에 걸쳐 책을 펼치고 두 번에 걸쳐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야 나는 "염세주의"에 대한 오해를 말끔히 씻어내고 조금은 "장자스러운" 생각을 해볼 준비가 됐음을 느꼈다.
나름의 정리를 통해 <당당한 염세주의자>라는 책을 통해 작가와 장자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들을 쉽게 풀어보고자 한다. 특히나 현대 사회에서 반강제적으로 경쟁하고 성공해야 하는 우리, 누군가에게 사랑받아야 한다는 강박을 주입받는 우리들에게 장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지, 감히 가공하여 전달해본다.
첫째, 성공에 실패한 이들에게
우리는 왜 성장하고 성공하려고 할까. 그것이 정말 우리가 원하는 바가 맞을까. 실물만 옆에 없다 뿐이지, 서점에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자기 계발 책들이, TV와 유튜브에서 몇백만 조회수를 찍는 성공한 사람들의 영상이, SNS에 떠도는 Young and rich 들의 소식이 우리의 일상에 빈틈없이 끼어들어와 우리를 지배하는 정령이 된다. 이 성공의 정령은 우리의 머릿속에 성공과 성장, 자기 계발을 세뇌시키고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 이 될 것을 강요한다. 좀 더 나은 부품이 되기 위해 새벽마다 나를 침대에서 일으키고, 경쟁하게 하고, 좋아하는지도 모를 공부와 업무에 나를 빠트리고, 잠 못 들게 한다.
장자는 우리에게 노력을 멈추고 되려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을 제안한다.
말단 공무원으로 살았던 장자의 삶을 보면, 장자가 현학적이고 말만 번지르르한 학자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왜 장자는 한시바삐 살아도 집한 채 못 구하는 우리에게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을 제안하는 것일까.
장자가 생각하기에 쓸모없는 사람이야말로 사회가
아닌 스스로의 가치를 잘 지키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사람은 잘 나가는 사람들에 비해 사회에서 받은 것이 없다. 날마다 반에서 1등 하는 학생은 자연스레 주위 사람들에게 선망과 칭찬을 받아왔고, 갑자기 의사가 아닌 댄서가 되고 싶은 생각이 들어도 쉽사리 공부를 포기할 수 없다. 사회로부터 받은 응원의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쓸모없는 사람, 사회적으로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사회와 주고받은 것이 없다. 문득 보면 그러한 현실을 비관하고 속상해할 수는 있지만, 반대로 사회의 규제와 가치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즉 진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해볼 수도 있고, 주변에 얽매여 꿈을 포기할 이유도 없다. 조금 독특하고 이상한 행동을 해도 그 누구도 "너 갑자기 왜 그래"라는 식의 참견을 하지 않을 것이다.
쓸모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내면의 자유"를 얻는다. 자신이 되어야 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없다. 즉 자신을 모르며(규정된 자신이 없으며), 이 속에서 자신이 자연스레 드러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에 더 진정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를 위해, 작가는 "망량"의 이야기를 가져온다. 망량은 그림자의 그림자다. 이야기 속에서 망량과 그림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다룬다.
망량(그림자의 그림자)이 그림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조금 전에는 그대가 걸어가다가 지금은 그대가 멈췄으며, 조금 전에는 그대가 앉아 있다가 지금은 그대가 일어서 있으니, 어찌 그다지도 일정한 지조가 없는가?”
망량이 보기엔 그림자조차도 능동적인 주체인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림자가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임을 우리는 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무언가의 그림자일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 욕망하는 것은 진정한 내면의 소리가 아니라, 우리를 통제하는 무언가로부터 주입받고 영향받은 결과일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무아"의 존재이며,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쓸모없는 존재이자 무아로서, 삶을 계획하지 않고 미리 각본을 짜두지 않는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순리를 받아들이고 나에게 닥친 일을 행운 혹은 불행으로 판단하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모든 것은 자연스럽고, 벌어지는 이유가 있으며, 주어진 만큼 뺏기고 뺏긴 만큼 주어진다.
나는 나의 노예다. 내가 무언가를 원하고 싶다고 원할 수 있지도, 싫어하고 싶다고 싫어할 수 있지도, 피를 거꾸로 돌게 하고 싶다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무아를 깨닫고, 나의 감정과 몸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하지 마라' 등등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무아의 고요함 속에서 진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이미 성공한 이들에게
주변에서 성공한 누군가를, 혹은 당신이 이미 성공했다면 지금 당신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자. 당연히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고 생각했던 경우가 있었는지 떠올려보자. 내가 믿는 신념이 진리이고, 그것에 반하는 의견을 내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판단했던 적은 있었는지 생각해보자.
세상에 진리는 단 하나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진리이다.
작가가 풀어낸 장자의 호접지몽 이야기는 조금 충격적이었다. 하도 오랫동안 당연히 알고 있던 장자와 나비의 꿈에 대한 이야기와 조금은 다른 해석이라서 그런지, 읽고 나서도 몇 분간 이 이야기가 주는 재미와 충격에서 즐겁게 상상을 펼쳐보았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인셉션>이야말로 호접지몽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인셉션의 엔딩 장면은 열린 결말로, 많은 팬들에게 이 엔딩이 꿈인지 아닌지 많은 추측과 의문을 낳게 했다.
과연 지금의 삶이 장자가 꾸고 있었던 나비의 꿈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만약 지금이 깨어있는 장자의 삶이라고 해도, 지금의 삶이 또 누군가의 꿈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마치 인셉션에서 주인공이 꿈속의 꿈에 들어간 것처럼 말이다.
작가와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마 진짜 "꿈"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꿈이 뭘까. 마치 현실처럼 생생하고 그럴 듯 하지만, 깨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삶도 그렇다. 지금 얻은 명예와 성공이 영원하고 진리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조금 지나면 이러한 믿음은 마치 꿈에서 깨는 것처럼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고, 한낱 의미 없는 이미지에 불과해질 수도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 특히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바로 그런 것이다.
꿈에 집착하지 않고 너무도 생생한 이 꿈을 인정하지 않는 각성한 삶 말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장자가 꾼 나비의 꿈, 혹은 나비가 꾼 장자의 꿈은 둘 중 하나만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각자가 생각하는 진리는 모두 다르며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친 "자아의 팽창"이라고 장자는 경고한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고, 지금의 상황이 언젠간 깨질 수 있는 그저 수많은 '진리'들 중에 하나이자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자세. 자아를 팽창시키고 스스로가 진리라고 믿는 태도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상태이다.
작가는 또한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성숙한 어른 인간"이기보다는 "외로워하는 아이 인간"일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부귀와 나이,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 마음속에 "아이 인간"을 가지고 있다.
이 아이 인간은 언제나 외로워하고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어 하며 사랑에 집착한다. 이 때문에 진짜 상대방을 사랑한다기보다는 사랑으로 포장된 위험한 거래의 감정을 가지게 되고 다른 이들을 지치게 할 수 있다. 또한 명예와 인정받는 것에 집착하고 타인의 시선을 갈망하게 된다. 이러한 욕망에 이끌려 영예로운 성공을 거머쥔 이들이야말로 더욱 아이 인간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아이 인간이 바라는 것과 집착에 휘둘리지 않고 아이 인간이 성숙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신뢰해야 한다. 여기서 신뢰란, 다른 이들이 나를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가까이할 수도 멀리할 수도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존중함을 의미한다. 비록 그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경험일지라도, 모든 것이 자유롭고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다른 이들과 "진짜 공존"하는 법을 배우고 성장할 때, 우리는 아이 인간에 휘둘리지 않는 진짜 어른이 된다.
셋째, 외로운 이들에게
진짜 사랑은 무엇일까.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배고플 땐 밥을 먹여주는 것이 사랑일까. 장자는 우주와 만물의 관계를 통해 진짜 사랑을 이야기한다.
우주는 만물을 어질게 대할 필요가 없으며, 만물을 풀이나 들개 대하듯 한다.
우주는 만물에게 "치우치지 않는 사랑"을 보여준다. 고통스러워하는 인간, 생물들을 낫게 해주지도 않고, 모두가 춥고 배고프지 않도록 의식주를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우주가 만물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우주가 만물을 사랑한다면, 왜 우리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고 끝없는 실패를 안겨주는 것일까.
장자는 진짜 사랑이란 "그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지도록 지지하하고 포옹"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는 사랑, 상대방이 진짜 성장할 수 있는 시련 속에 있을 때 도움을 주는 사랑,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우선하는 대가성 사랑은, 장자가 생각하는 진짜 사랑이 아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사랑일수록 상대방이 알아채지 못한다. 보여주기 식 사랑의 끝은 결국 "당신도 나를 이렇게 사랑해"라는 무언의 압박이 될 수 있다. 힘들 때 손 내밀어주는 사랑은 상대방이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앗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상대방이 스스로가 가진 능력을 발휘하고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랑일수록, 상대방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조금은 무정하게 들릴 수 있다. 인간이라면 마음속엔 "아이 인간"이 있기에,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랑이나 가시적인 사랑을 원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장자의 이런 사랑 이야기는 외롭고 고독하며 사랑받지 못할 확률이 높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더 큰 위로가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당신이 알아채지 못할수록 더욱 깊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누군가에게 가장 위대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장자가 반복하는 우주, 운명, 꿈, 순리 등의 이야기들은 과학이 지배하는 지금 세상에서는 멀게만 느껴지는, 옛사람의 궤론으로 들릴 수도 있다. 문득 보면 자칫 사이비 종교의 이야기인가 싶기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진짜 "우주"라는 대상이 존재하는지, 진짜 "운명"이란 것이 존재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배워야 할 것은 장자가 제시하는 삶의 태도다.
장자의 이런 이야기는, 경쟁과 성공의 압박에 지친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 수도, 성공에 취해 타인과 공존하는 삶의 방식을 잃어버린 이들에겐 경고가 될 수도, 고독과 외로움에 빠져 눈물로 하루를 보내는 이들에게는 사랑이 될 수도 있다.
염세주의는 사실 세상을 미워하고 사람들을 좌절시키려는 학문이 아니다. 최소한 이 책에서 말하는 장자의 염세주의는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서로 공존하고 존중하며 성공과 실패의 노예가 되지 않는,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조용히 제안하는 학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