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또 Apr 23. 2020

모순이라는 삶의 페달

양귀자 장편 소설 <모순>을 읽고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 양귀자 <모순> 127 쪽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니다. 시쳇말로 쳇바퀴 돌듯 그냥저냥 살아가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하루하루를 이어 삶을 엮어나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의미 없는 반복만큼 서서히 삶의 의지를 옥죄는 것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목적지도 모르는 체로 자꾸만 흘러가는 시간들을 잡아다가 삶이라는 직물을 짜낸다. 가끔은 악몽 같은 과거를 미화하기도 하고, 어두울 미래를 낙관하기도 하며, 지루할 게 분명한 내일을 기대하게 할 꼬투리를 기어코 찾아내며 잠들기도 한다. 사랑하지 않는 것을 사랑하고, 기대하지 않는 것을 기대한다.


모순은 그러므로 삶의 페달이다. 앞을 향해 끊임없이 번갈아 떨어지고 오르는 페달들처럼, 우리는 삶의 핸들을 앞으로 향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모순의 페달을 밟는다. 모순이 사라진 삶, 올라갈 일도 내려갈 일도 없어진 삶은, 동력이 사라진다. 



모순 첫 번째 축 : 가족


학교 후배의 추천으로 손에 들게 된 이 소설은 제목이 곧 주제이자 내용이다. 모순. 모든 것을 뚫어버리는 창과 모든 것을 막는 방패. 각자 보면 말이 되지만, 둘을 붙여놓으면 말이 되지 않는 상황. 소설은 끊임없이 모순을 이야기하고, 모든 인물들은 모순의 상황에 내던져진다. 


일단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장 큰 축은 '가족'이다. 그 축의 한 편에는 화자이자 주인공인 안진진의 가족이, 반대편에는 쌍둥이 이모의 가족이 있다. 두 가족의 가족 구성만을 보면 마치 데칼코마니 같다. 쌍둥이인 어머니들은 물론이고, 누나들인 안진진과 주리는 동갑에 결혼 시기도 비슷하며, 남동생들인 진진의 동생 진모와 주리의 동생 주혁 역시 동갑내기다. 어찌 보면 서로 닮았기에 더 비슷하고 어우러질 것만 같은 이 가족들은 실상을 까 보면 그 어느 하나 겹쳐지지 않는 평행선과 같다.


어머니의 가족은 '모순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이루며, 이모의 가족은 '정시에 출발하는 기차 같은 세계'를 구성한다. 안진진의 어머니는 언제나 과장법을 입에 달고 살며, 술주정으로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를 때리던 아버지는 그녀를 때리는 와중에도 스스로 괴로워했고, 남동생 진모는 조직의 보스 연기에 취해 진짜 자신을 지우고 모래시계와 대부 속 인물로 살기를 자처한다. 안진진 역시 사랑을 대하는 태도에서 모순으로 가득한 인물이다. 텍스트로 보자면 너무나도 비정상적이다. 괴롭고 답답하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삶이 있다. 괴로움과 모순이야말로 삶의 저변을 강제로 찢고, 늘려서 넓혀주는 스승이며 움직이지 않는 삶의 바퀴를 억지로 끌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다.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

- 양귀자 <모순> 268 쪽 


반면 이모의 가족은 너무나도 정석적이다. 여행지에 가면 자신의 사진, 아내의 사진, 둘이 같이 찍은 사진 세장만 있으면 끝나는 이모부의 여행 방식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주리와 주혁 역시 삶의 샛길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곧장 앞으로만 나가며 살아갔다. 유일하게 이모만이, 어머니와 그렇게도 닮은 이모만이 낭만과 모순을 좇고 안진진을 아꼈으며 안진진의 아버지마저 좋아했다. 이모는 사실상 어머니의 삶을 동경했다. 거칠고 어렵지만 높낮이가 있고, 간당간당한 통잔 잔고 탓에 간절하게 하루를 살아야 하는 생생한 삶을. 위험과 모험과 우연으로 덕지덕지 가득 찬 삶을.


그렇기에 이모의 자살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 누구보다도 모순이 필요로 했던 인물에게 단 한 톨의 틀어짐도 용납되지 않은 삶은,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모순 두 번째 축 : 사랑 


이 이야기를 사랑 이야기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안진진은 거의 책의 끝나갈 때까지도 자신이 누굴 사랑하는지, 사랑이란 게 도대체 뭔지 정의하지 못한다. 결국 그녀가 느꼈다는 사랑은, 우리가 알던 그런 사랑이 아니다. 달콤하고 설레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안진진은 사랑을 '누군가 발목을 붙잡고 잡아당기는 느낌, 가슴에 구멍이 뚫려 눈물이 나도록 외로운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안진진은 '사랑이 아름답다고 하는 말은 다 거짓이었다. 사랑은 바다만큼도 아름답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랑은 사랑이었다'라고 표현한다. 


내심 사랑에 대한 이런 표현이 마음에 꼭 들었다. 사랑에 대한 많은 노래와 드라마들은 사랑의 일부만을 보여줄 뿐이다. 안진진이 느끼는 이러한 사랑의 감정도 빠질 수 없는 분명한 사랑의 느낌이다.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 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보장하는 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 양귀자 <모순> 210쪽


그렇다. 안진진에게는 사랑마저도 모순적인 것이다. 사랑은 가끔은 나를 멈춰주고 진정시켜주는 안전장치가 될 때도 있지만, 그 안전장치 탓에 가볼 수 없는 위험한 길에 대한 미련이기도 하다. 


안진진에게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김장우와 나영규. 첫 번째 축처럼, 이 둘 역시 김장우는 모순의 세계를, 나영규는 정시 기차의 세계를 대표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진진은 김장우를 사랑했다. 의심할 여지조차 없이 그녀의 화살표는 김장우를 향했다. 그녀가 가슴에 허함을 느낀 것도, 거짓을 취해서라도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한 것도 모두 김장우였다. 


그에 반해 나영규에게 취하는 태도는 흡사 이모부를 바라보듯 한다. 아니, 그의 모습은 이모부나 마찬가지다. 나영규의 결혼 계획에 맞춰 안진진은 청혼에 대한 대답을 재촉당하고, 모든 데이트 코스는 이모부의 여행과 마찬가지로 흐트러짐도 틈새도 우연도 없다. 


하지만 안진진은 나영규를 택한다. 이 경악스러운 결정은 사실 한 번에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녀가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김장우와 나영규에 대해 묘사하고 모순에 대해 고뇌하는 데 할애된 지면에 비해 그녀의 결정에 대한 이야기는 단 몇 줄만에 끝나버린다. 하지만 책을 다시 펼쳐 이리저리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이 모순적인 결정은 극히 마땅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김장우의 얼굴에서 문득 아버지의 얼굴을 읽었다. 너무 특별한 사랑은 위험한 법이었다. 너무 특별한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만 다른 길로 달아나버린 내 아버지처럼. 김장우에게도 알지 못하는 생의 다른 길이 운명적으로 예비되어 있을지 몰랐다. 지금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알아도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사랑조차도 넘쳐버리면 차라리 모자란 것보다 못한 일인 것을.

- 양귀자 <모순> 277쪽 


김장우에게 사랑을 느낀 직후 술을 마신 안진진은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보였던 폭력적이지만 넘치는 사랑을 똑같이 김장우에게 취한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김장우의 얼굴과 입술에서 그녀는 역시 아버지를 본다. 자신에게서도, 김장우에게서도, 넘치는 사랑의 모습에서 자꾸만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순간부터 어쩌면 안진진은 김장우와 결혼할 수 없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늘 작은 것에 이성적이고 큰 것에 감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휘리릭. 안진진은, 갑자기, 나영규와 결혼한다. 



모순 마지막 축 : 안진진 


가족이라는 사회적인 축, 사랑이라는 감정적인 축을 지나 마지막으로는 안진진 자신이야말로 그 속 깊이에 모순의 축을 품고 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성 탓에 이름조차도 스스로를 부정하는 존재의 숙명을 타고난 '안'진진. 


그녀가 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입술에서는 거짓말이 새어나가기 일쑤고, 살인 미수인 남동생에게서 조금의 죄책감이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했으며, 결국은 사랑의 선택조차도 진심과는 어긋나 버린다. 그녀의 마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인물 같지만, 심심한 친구들을 위해 가출을 일삼고 심심한 이모를 위해서는 첫눈 오는 날 저녁도 흔쾌히 내어주는 정 많은 인물이다. 


자칫 모순적인 안진진에게 답답합을 혹은 안진진을 미워하게 될 독자도 있을 성싶다. 하지만 안진진은 달리 특이한 인물이 아니다. 평범하고도 평범한 나이자 친구이자 가족이자 동료다. 우리는 만화 캐릭터가 아니다. 평생을 악하게 혹은 선하게, 한 인물만을 연기하며 살지 못한다. 뻔뻔스러울지는 몰라도 거짓을 통해 나를 지켜야 할 때도 있고, 작은 고통을 과장해서 굴복해버리는 것이 안전할 때도 있다. 우리에게는 그 누구도 안진진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모두 가슴속에 안진진, 그러니까 모순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나는 안진진의 삶에 설득당했고 안진진이 되었다. 그녀가 그나마 낭만의 대상으로 삼았던 가출한 아버지가 중풍과 치매에 점철된 채로 돌아왔을 때는, 정말이지 가슴이 바늘로 콕콕 찌르듯이 아려왔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그리는 그림대로만 그려지는 삶은 고통은 없을지 몰라도 숨쉬기는 힘드리라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안진진을, 나를 위안해야 했다. 그래야 내일을 살아가고, 모레를 살아가고, 삶을 어떻게든 완성시킬 수 있기 때문에. 


물론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는 시기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불행할 필요는 없다. 안진진이 했던 말처럼, 오히려 삶의 다양한 면을 통해 세상의 숨겨진 비밀들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평생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행과 같기 때문이다. 삶이 놓아준 다양한 반찬들, 건강에 좋을지 나쁠지 알 수 없어도 계속 젓가락질해야 하는 그런 삶은 최소한 '가장 불행하지는 않은 삶'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통과 불행, 즐거움과 행복을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우리의 삶은 굴러간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 양귀자 <모순> 296쪽 
매거진의 이전글 염세주의자는 '프로불만러'가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