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나 라쿠르 <우린 괜찮아>를 읽고
내가 예전에 세상을 이해하던 방식과 지금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르다. 나는 이야기를 읽고 눈물을 흘리고 책을 덮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에 울림이 있고 가시처럼, 종기처럼 도무지 떠날 줄 모른다.
"넌 혼자였구나." 메이블이 말한다. "그 시간 내내."
마린은 자신이 존재했던 세계, 정확히는 자신과 할아버지가 함께 존재했던 세계로부터 도망쳤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옷장 속에서 몰래 키우고 있었던, 할아버지만의 세계의 민낯을 마주해버렸기 때문이다.
마린이 진짜 외로워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고 유일하게 알고 있던 세상은 사실 할아버지의 일부였을 뿐이었고, 할아버지에게는 할아버지만의 세상이 있었으며, 그 세상을 결코 솔직하게 마린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로 인해 마린은 배신감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며 그야말로 '어찌할 줄 모르는 채' 괴로워한다.
이전까지 마린에게 이 세상은 책 한 권과도 같았다. 내 삶이라는 무대에 메이블이, 할아버지가 등장했었고 그들과의 연대감은 결코 얕지는 않았으나 그저 내 삶의 '조연'이자 '대상'일뿐이었다. 할아버지와는 가장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공간을 들여다보지 못했고, 정열적인 사랑의 대상이었던 메이블 역시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는 그저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는 과거의 실마리로 느껴졌을 뿐이다. 그들의 세상을 제대로 마주하고 받아들일 줄 몰랐던 것이다. 그저 덮어버리면 그만인 이야기였다.
물론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할아버지의 죽음 전, 마린에게 이 세상은 '나'라는 하나의 축만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이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축들이 있음을, 그 축들이 반드시 마주치고 교차해야 하는 법은 없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할아버지의 세상을 마주하며, 그렇게 마린만이 키워나가던 마린의 세상에 생채기가 나기 시작한다. 온전했던 세상에 처음 찢어진 틈 사이로 보이는 새로운 세상은 너무나 두렵고 아픈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아픔을, 각자의 사랑을 키우고 있었고 그 속에는 내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조연일 수도 주연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마린에게 이제 소설책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소설책 안에서 피어나는 이야기들은 이제 그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이야기들은 나의 세상이 될 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세상이 될 수도 있기에. 그렇게 마린은 어른이 된다.
마린의 이야기 주위를 가장 오래 맴도는 인물은 바로 메이블이다. 메이블은 900개가 넘는 문자를, 전화를 마린에게 보낸다. 마린에게 메이블은 마주하기 힘든 과거의 세상이지만, 메이블은 마린이 혼자만의 세상에 갇히는 것을 바라지 않는 인물이다.
이 소설의 모든 이야기와 인물을 둘로 나누자면 한쪽의 대표는 지금의 마린, 다른 한쪽의 대표는 메이블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린에게는 겨울, 뉴욕, 외로움, 눈, 자연과학, 혼자라는 키워드가 따라다니지만, 반대로 여름, 캘리포니아, 가족, 사랑, 바다, 문학, 순진함, 따뜻함이 메이블과 함께한다.
메이블은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도망쳐 춥고 외로운 곳에 있는 마린을, 놓지 않는다. 문자로 전화로, 그리고 결국은 직접 비행기를 타고 자신의 몸을 마린 곁으로 데려오기까지 한다. 메이블은 마린과 달리, 다른 이들의 세상을 들여다보고 함께하는 법을 아는 인물이다.
마린과 메이블이 세상을 느끼는 방식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 바로 <두 명의 프리다>를 함께 감상하며 둘이 나누는 대화들이다.
나는 다시 화면을 본다. "어쩌면 그냥 단순하게 보이는 그대로 일 수도 있어. 과거의 여자는 이런 사람이었어. 제대로 된 심장과 사랑하는 사람을 가진 사람. 그땐 마음이 편안했어. 그러다가 무슨 일이 있었고 그래서 변한 거야. 상처를 입은 거지."
(중략)
"이 그림에서 가장 내 마음에 드는 점이 있다면." 메이블이 말한다. "두 사람이 그림 가운데에서 손을 잡고 있다는 거야. 그게 진짜 중요해. 내가 보기엔 그게 이 그림의 주제인 것 같아... (중략)... 하나의 사물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게 어느 모로 보나 훨씬 나아. 난 이 그림이 더 좋아졌어."
어찌 보면 이 대화는 결국 복선이자, 둘의 진심을 보여주는 말들이었다. 메이블은 다양한 해석을 좋아하고 복잡함을 사랑하며 그런 다양한 이야기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진짜 중요한 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손을 잡고 있는 것' 즉 '함께'라는 것에 주목한다.
상처와 변화에만 반응하는 마린과 다르게 메이블은 두 프리다의 관계를 바라보며 둘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교감'. 결국 메이블은 이 그림에서 자신이 주제라고 생각한 것처럼, 혼자서는 괜찮지 않은 마린의 손을 잡아준다. 메이블과 메이블의 부모님은 결코 마린이 혼자 아파하지 않도록, 처음 찢어져버린 세상이 두려워 스스로 갇히지 않도록 마린의 손을 잡고, 가족이 되어준다. 함께해야 괜찮다는 사실을, 각자의 세상이 있다면 함께의 세상도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알려준다.
섬세하고 감성적인 문체만큼이나,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우리는 끊임없이 상처 입고 그 상처를 통해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며 성장한다. 이 이야기는 삶이 할퀴는 상처를 처음 마주하며 20대가 된 인물의 이야기다.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인물이 가장 낯설어지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과 가장 가까운 관계가 되는 것. 삶은 우리를 그렇게 들었다 놨다 하며 키워낸다.
이 책의 가장 큰 주제는 성장이기도 하지만, 성장의 디딤돌이 되는 '공감'과 '교감'을 다루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괜찮지 않은 이들에게 가장 좋은 치유법은 역시나 공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림 속 두 명의 프리다 중 누가 상처 받고 누가 상처 받지 않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국 둘은 손을 잡음으로써, 심장이 연결되고 마음이 연결된다. 각자의 삶은 각자가 책임져야 하는 게 맞지만 그렇다고 혼자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사는 방법'은 아니다.
각자의 세상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같이 살아가는 세상도 키워나가는 것. 서로가 기대고 손잡으며 세상의 많은 축들을 나의 삶 속에 들여오는 것. 그럼으로써 서로 공감하고, 교감하고, '같이 있어 괜찮아지는 것'.
문득 내가 마린이었던 많은 순간들과, 내 주변의 많은 마린들이 떠오른다. 그들에게 메이블이 되어 나의 손을 흔쾌히 내어줄 수 있는, 조금은 감성적인 어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