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데리고 순수하게 살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1차적 결론
나에게 '나'라는 존재는 항상 생경했다. 내가 알던 나의 모습은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내가 아니었다. 가끔은 나도 내가 왜 이렇게 우울한지 알 수가 없었고, 그렇게 가고 싶던 여행지에 가서도 생각보다 기뻐하지 않는 나 자신이 밉기도 했다. 어제 세웠던 계획은 오늘의 내가 거부했고, 확고한 의견도 취향도 없는 줏대 없는 나의 자아를 꾸짖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나'라는 사람을 데리고 어떻게 삶을 꾸려가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비록 긴 세월은 아니지만,
그렇게 '나'는 누구이고,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여태껏 고민해왔다.
어쩌면 이런 고민조차 게을렀는지도 모른다. 외면하기 이보다 쉬운 대상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최근에 내 앞에 나타난 책들과 사람들을 통해(마치 표식처럼 등장했다!) 점차 나의 삶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졌다. 특히 아주 최근에 읽었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라는 책과 '당당한 염세주의자'의 영향이 컸다. 이 책들을 읽으며 '삶 초보자'가 된 기분이었다. 간단하게 살면 될 것을 그다지도 나를 괴롭고 복잡하게 괴롭혀 왔구나. 내 삶을 통제하려고만 하지, 진짜 '나'를 존중하지 못했구나. 나에게 너무 미안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는 순수하게 살지 못했다".
호기심에 찬 눈 빛으로 아는 것도 의심하고, 가던 길도 새롭게 느꼈어야 했다. 작은 일을 작은 채로 놔두지 않았고, 마음속에 내가 있다는 믿음에 '나'를 찾으려 내 마음을 후벼 팠다.
1. 아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나는, 그리고 사람들은 쉽게 착각에 빠진다. 한 번, 두 번 본 사실은 기정사실이라는 착각에 말이다. 물론 이러한 생략 프로세스 탓에 인간은 빠르게 생각하는 능력을 터득해, 똑똑해지고 복잡한 동물이 되었다. 인류라는 종의 입장에서는 분명 중요한 뇌 발달의 과정이었으리라. 하지만 내 삶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는 듯하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고 벌인 일들이 내 발목을 잡을 때도 있고, 내가 나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에게 든든한 동아줄이 될 때가 있었다. 내 눈과 내 뇌에 껴버린 판단 생략 필터는 상대방과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고 내 삶을 종종 방해하고는 한다.
아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오히려 모를 때, 대상을 더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사는 게 더 재미있기도 하다. 항상 새롭고 항상 신기하게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어린아이처럼, 처음 보는 세상에 항상 즐거워하며, 순수하게.
2. 세상이 드러내는 표식에 관심을 갖자
그럴 때가 있지 않나. 우연히 아침에 TV를 틀어 보게 된 잡채가 마침 점심 식단으로 나오고, 저녁에 읽고 있던 책을 펼쳤더니 책의 주인공까지 잡채를 먹고 있는 그런 경우. 마치 온 세상이 나에게 잡채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런 상황.
세상은 가끔 우리에게 표식을 드러내고 시그널을 보낸다. 우주의 기운이나 종교적인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조그마한 꿈들이 세상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그 표식이 음식일 수도, 여행지일 수도, 어쩌면 책 한 권일 수도 있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서는 이 표식을 '공개된 비밀'이라고 부른다.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철저한 비밀이기 때문이다.
'나'를 알고자 할 때는,
먼저 우리 주변의 세상이 나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지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비밀스러운 속삭임들을 모아보다 보면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조금은 힌트를 얻을지도 모를 일이다. 에라 모르겠다, 한 번 그 표식들을 따라보자. 뜬금없이 잡채도 먹고 아무도 가지 않는 여행지로 떠나 보자.
3. 작은 일은 작게 내버려두기
작은 일을 작게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과제가 아닐까 한다. 예전의 나는 내가 워커홀릭이란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는데, 워커홀릭이야말로 "작은 일은 크게, 큰 일은 더 크게" 받아들이는 사람이지 싶다. 남들은 무시하고 갈 수 도 있는 작은 코드 한 줄에 집착하고(필자는 개발자이다) 아침에 배포한 코드가 왠지 항상 자기 전에 의심된다. 그럴 땐 침대에서라도 노트북을 꺼내 확인해봐야 적성이 풀렸다.
물론 회사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하다. 회사 입장에서는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조심해서 매출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첫 번째 목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의 주제가 주제인 만큼 '나'와 함께 사는 '삶'에 있어서는 이보다 나쁠 수가 없다.
작은 일은 우리의 시간을, 하루를, 정신을, 그리고 삶을 지배한다. 우리가 작은 일을 크게 만드는 과정 속에서 너무도 많은 추측과 오해와 걱정이 사족으로 따라붙는다. 오늘 내가 뱉은 한 마디, 오늘 그 사람이 나에게 한 한 마디는 모두 별 것 아니고 큰일이 아니다.
작은 일은, 제발, 작게 내버려 두자.
4. '나'라는 허상 벗어던지기
사실 내 모든 고민의 출발점이자 중심점에는 바로 이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주관도 뚜렷해 보이고, 호불호도 뚜렷하며, 좋고 나쁜 기질이 뚜렷한 것 같은데, 정작 나 스스로는 생각도 이리저리 휘둘리고 좋았던 게 싫어지기도 하고 먹기 싫었던 게 먹고 싶어 지기도 했다. 내가 누구인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내 속의 나는 약이라도 올리듯 마음속 여기저기에서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마치 만화 속, 영화 속 주인공처럼 뚜렷한 '캐릭터'가 있는 것이 올바른 '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의 삶은 단 한 편의 영화가 아니다. 기승전결이 순서를 뒤바꿔 밀려올 때도 있고, 악역과 히어로가 뚜렷하게 나누어져 있지도 않다. 매 순간 모든 장소에서 수백만 개의 영화와 드라마가 동시에 펼쳐진다. 우리는 모두 여러 이야기에서 여러 역할을 맡으며 살아가고 있다. 당연히 '나'도 유연하고 다양한 취향을 가진 물렁물렁한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세상 속에서 모든 순간 변한다. 세상과의 소통 속에서 1초 전의 '나'는 지금의 '나'가 아니다. 나를 들여다보는 순간 역시 나는 변해있기 마련이다.
뚜렷한 '나'는 사실 허상에 가깝다.
그냥 '변하는 나'를 믿고 그냥 살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그때그때 드러나는 나의 취향과 욕구, 그리고 그것이 반영된 세상의 표식에 따라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글의 제목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하다가 4가지 깨달음을 적고 보니 '순수하게 산다'라는 문장 하나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호기심 넘치고 확대 해석하지 않으며 그저 즐겁게 살아가는 것. 생각을 비우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눈 앞에 지나가는 표식을 놓칠 일도, 지상낙원 같은 여행지에서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도 없을 테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