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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또 Sep 28. 2019

휴먼 스케일로 보는
행복에 대한 진부한 이야기

인간은 알 수 있는 만큼만 행복하다. 

휴먼 스케일이란 단어를 들어보았는가? 한국어로 하면 "인간 척도"라는 뜻이다. 한국어로 봐도 생소한 이 개념은 인테리어와 도시 디자인에서 자주 언급되는 아주 중요한 "자"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공간을 디자인 함에 있어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자는 철학이다. 의자가 그저 니은자로 생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앉을 수 있고 다리가 편해야 하는 사이즈여야 하듯이, 건축도 자동차가 드나드는 공간이 아닌 인간이 이용하고 소통하는 공간임을 인지하고 디자인 하자는 것이다. 


이 개념을 처음 접하게 됐던 건, "얀겔의 위대한 실험(Human Scale)"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다. 이전 글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다큐멘터리다. (참고 : https://brunch.co.kr/@netsgo0319/66)

간단히 요약하자면, 도시를 인간 척도에 맞게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업화와 도시교통 발달로 인해 도시는 어느새 길의 대부분을 "자동차"에 내주고 정작 도시의 주인인 우리는 좁은 길에서 어깨 부딪히며 걷는 지금의 모습을 수긍해버렸다. 하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모여야 행복하며 걸을 수 있는 곳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몇 년 전이지만,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꽤 많은 생각을 했었고 좀 더 도시 공학,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다가 우연히 얼마 전,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을 만나게 됐다. 책 디자인부터가 너무 맘에 들었고, 얼핏 들추어 보니 휴먼스케일을 다루는 듯한 내용에 매료되어 단숨에 읽어버렸다. 참 와 닿는 게 많은 이야기였다. 건축과 도시 공학에 대한 깊은 지식을 바라고 읽는 분들에게는 다소 가벼울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작가의 엄청난 통찰력과 서울이라는 익숙한 소재가 만났기에, 일반 독자들에게 "도시"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만들어 주는 여지를 준 점에서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휴먼 스케일을 내 생애 두 번째로 만나면서, 인간의 행복에 대한 진부한 얘기를 해보고 싶어 졌다.


다시 휴먼 스케일로


휴먼 스케일의 정의를 다시 한번 살펴봤다.

휴먼스케일[Human Scale]

인간의 체격을 기준으로 한 척도. 건축, 인테리어, 가구에서는 길이, 양, 체적의 기준에 인간의 자세, 동작, 감각에 입각한 단위가 필요하다.

볼 때마다 감동적인 정의다. 너무나 기본적이지만 언제나 무시당하는 개념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좋은 건물, 좋은 아파트라고 하면 항상 웅장하고 높고 주차장이 잘되어 있는 건물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린다. 


하지만 우리가 연인과 데이트를 하고 싶고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곳은 의외로(혹은 당연히) 그런 곳이 아니다. 높은 건물들이 즐비한 테헤란로에서 친구와 만나 즐겁게 몇 시간을 보내본 적이 있는지? 당연히 없다. 애초에 그곳에서 만날 이유조차 없기 때문이다. 요즘 뜨는 곳을 살펴보면 힙지로, 익선동, 북촌 한옥마을, 송리단길, 망리단길, 연남동 등 오히려 차로는 도대체 들어갈 수조차 없는 북적거리는 골목에 가깝다. 



우리는 왜 넓고 깨끗한 테헤란로가 아니라 좁고 지저분한 힙지로에 열광하는가


인간은 태생적으로 변화에서 재미를 느끼고, 지루한 것은 싫어하는 동물이다. 볼 게 없다면서도 티브이 앞에 앉아서 채널을 돌리고 앉아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말 볼 게 없는 걸까? 아마 무심코 지나친 채널 중에는 희대의 명작 영화가 지나갔을 수도 있고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다큐멘터리가 스쳐갔을 수도 있으며 배꼽이 백번은 빠질 개그 프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인지 능력과 인내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다. 방송이 단 2~3초 안에 시청자를 홀리지 못한다면 리모컨을 쥔 권위 로운 시청자는 그 채널을 실패작으로 판단한다. 그 2~3초가 인간의 인내력과 통찰력의 한계인 것이다.


놀랍게도 이런 채널 돌리는 인간의 특성은 힙지로를, 익선동을 핫플레이스로 만들어줬다. 2~3초를 걸으면 나오는 새로운 작은 가게들,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광경들은 그곳을 걷는 사람들에게 "재미"를 준다. 아마 10초를 걸어도 내내 같은 광경만 나오는 거리, 예를 들자면 테헤란로라든가 내가 일하는 판교역 근처는 사람들에게 찾고 싶은 곳이 아닐 것이다. 마치 한번 채널을 돌리면 무조건 10초 이상을 봐야만 하는 리모컨을 사람들에게 강제로 쥐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즉 인간의 인지 능력 스케일을 고려한 것이 휴먼 스케일이며, 이 휴먼 스케일을 잘 적용된 곳들이 세계 각지의 핫플레이스로 뜰 수밖에 없는 것이다. 


행복에도 적용되는 휴먼 스케일 


책을 읽고 한참을 생각하다 보니, 휴먼 스케일이 공간이나 디자인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행복을 느끼는 상황도 "휴먼 스케일"에 기반한다. 


며칠 전에 유명기업의 모 사장이 이혼하면서 위자료로 자산의 1%를 전 배우자에게 지급하도록 판결이 났는데 그 1%가 141억 원이라는 기사를 봤다. 공개된 전 재산이 2조 5천억이라니, 100억 도 가져본 적 없는 나로서는 마치 문과생에게 양자역학을 설명해주는 것만큼이나 막연하고 알 수 없는 영역이다. 


물론 이혼이라는 힘든 일을 겪었겠지만, 이혼하기 전에라도 2조 5천억의 자산가는 1억 도 없는 우리보다 몇 천배 행복하고 몇 천배 즐거운 하루를 보낼까? 


우리는 흔히 돈이 많으면 행복하겠지, 파리에서 한 달을 살면 행복하겠지, 퇴사하고 집에 누워있으면 행복하겠지 처럼 부러움에 기반한 추측을 하곤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시간은 그 행복의 기원이 된 사건으로부터 기껏 해봐야 몇 분, 길어야 몇 시간에 그친다. 아마 갑자기 2조 5천억을 준다고 해도 그 쾌감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기억력은 그리 대단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 삶의 행복 휴먼 스케일은 몇십 년 단위가 아니라 짧은 순간이 될 수밖에 없다. 



테헤란로가 아닌 익선동 같은 삶을 살자


우리의 삶도 그런 휴먼스케일을 고려해서 살아나가야 한다. 막연하고 거대한 계획에만 따르는 삶보다는 작고 소소한 순간을 지키는 삶이 더 행복하다. 물론 거대한 계획에 맞춰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은 더 성공하고 더 부자가 될 수는 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들을 만나서 웃고 떠드는 순간들, 감사함을 표현하는 순간들, 누군가를 돕고 작은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들을 많이 보유한 사람들이 매일 고독한 하루를 보내는 수천억 자산가보다는 더 행복할 것이라는 점이다. 삶이 도시고 삶의 주체인 우리가 건축가라면, 테헤란로 같은 재미없는 부자의 삶보다는, 익선동처럼 작고 다채로운 변화가 많은 삶을 설계하는 것이 더 이롭고 행복할 것이다.


결국 삶을 뒤 돌아봤을 때 나를 웃게 해주는 건 나에게 달려오던 강아지의 모습, 내게 안겨 웃던 아이들의 모습, 배우자와 오붓하니 차 한잔 하며 이야기 나눴던 순간들이지, 내가 소유한 기업의 개수 같은 것들은 아닐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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