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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또 Jun 21. 2020

[일상첨화#8] 순간을 환영하고 이별하는 법

지금을 살기 



볕이 강해 집안으로 피신한 일요일 오후. 

남편이 반신욕을 하며 보는 유튜브 소리가 화장실 문 너머로 가느다랗게 울리고, 강아지 뭉치는 여지없이 낮잠을 청합니다.


읽던 책을 다 읽고 뭉치 앞에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뭉치의 머리털이며 발바닥이며 스치듯 쓰다듬자니, 어제 목욕하며 발라준 강아지용 컨디셔너 향이 퍼집니다.

뭉치는 귀찮은 듯 눈을 꿈뻑이며 나를 쳐다봅니다. 산책을 나가거나 간식을 주기 위한 게 아니라면, 보통은 뭉치를 만지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다행히 뭉치의 졸음과 귀찮음이 내 손길을 허락합니다. 


갑자기 눈물이 찔끔 납니다. 


매일매일 커가는 아기 강아지 뭉치이기에 지금 이 순간의 뭉치는 이 순간이 지나면 없다는 생각에 갑자기 벅차올랐습니다. 

참 주책이다 싶다가도, 아 이런 게 지금을 사는 느낌이구나 라는 생각에, '오랜만에 글을 써야겠다' 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읽은 책들, 겪은 일들, 심지어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의해 접하는 유튜브 클립마저 나에게 일관성 있게 말한다.


'지금을 살고 지금을 감탄하라' 


생각해보면 지난 29년의 생애 동안, 내가 '지금'을 산 것은 몇십 년 아니 몇 년이 되기는 할까 싶다. 최소한 내가 기억하는 한에서는 다 합쳐봐야 일 년? 이년은 될까. 미래를 낙관 혹은 좌절하며, 과거를 회상 혹은 후회하며, 그리고 스마트폰이란 것이 생긴 이후에는 미래도 과거도 지금도 아닌 ip주소 어딘가에서 수년의 시간을 보냈을 게 분명하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접속해 나의 '지금'을 빼앗은 인스타그램도 지우고, 남들의 (진짜일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워 보이는 시간들을 보기 위해 내 '지금'을 소비해버린 유튜브도 자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머릿속에 수도 없이 파고드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과거에 대한 후회들로 지금 내 살에 스치는 강아지의 향기와 온도와 표정조차도 온전한 집중력으로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오늘 오후 느낀 '지금'의 느낌은 참 묘했다. 너무나 행복하면서 동시에 슬펐다. 다시는 못 볼 지금의 이 광경, 이 소리들이 감격스러웠다. 




남주혁 님이 삼시 세 끼에 등장해 감성 충만한 상태로 뱉은 '조명, 온도, 습도' 발언은 짤로, 혹은 말로 사람들을 놀리는 도구가 되고는 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본방송에서 그 장면을 보았을 때, 우습지도 오글거리지도 않았다. 방송 상에서는 더없이 좋은 놀림의 소재가 될 수 있겠지만,  남주혁 님은 분명 그 순간에 집중하고 '지금'을 느낀 게 분명하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조명과 온도와 습도를 느끼고 있는지! 좀 더 지금을 느끼고 감탄할 필요가 있다.


지금을 환영하고 동시에 아름답게 이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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