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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또 Sep 03. 2020

[일상첨화#9] 낼름이와 리모

반려식물이 주는 위로

나는 속도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지루하고 멈춰있는 것들을 참지 못한다. 언제나 새로운 것들을 좇아, 회전하는 선풍기처럼 두리번거린다. 보이는 성과와 성장에 집착하며, 재미없고 익숙해진 일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선지 6년 차인데도 벌써 세 번째 회사를 다니고 있고, 꾸준하게 무언가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이러한 성질은 가끔은 장점이 되기도 했다. 일이든 공부든 빨리 습득하고 어디를 가든 빨리 적응하는 것. 샘솟는 호기심 탓에 각종 취미 활동을 섭렵하는 것. 어렸을 때는 이런 모습이 팔방미인이네, 도전적이네 하는 칭찬을 이끌어내고는 했다.


하지만 서른을 앞두고 돌아보니 이제는 이러한 성질이 단지 장점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재미만 좇다가 무엇이든 어중간하게 하는 나와는 다르게, 어찌 보면 재미없어 보이는 일들을 진득하니 하고 있는 누군가들은 하나둘씩 세상에 작게나마 자신만의 결과를 내놓고 있다. 벌써 1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자신만의 음악으로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동갑내기들이 너무나 많다. 자기 전에 누워 유튜브를 보고 있으면, 그런 분들의 일상과 노력과 결과들이 눈과 귀로 흘러들어 조바심으로 바뀐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다음날이 되면 회사일이라는 좋은 핑계로 또 하루를 보내다가 조바심 나는 저녁으로 돌아간다.




그러다가 친구의 추천으로 반려식물을 키우게 됐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집에 나무니 풀이니 꽃이니, 정원 수준으로 식물들을 많이 키우셔서 그런지 그다지 새로워 보이지 않았다. 키우는 강아지 말고도 책임져야 할 생명이 더 늘어나는 것도 왠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움직이지 않고 느리게 성장하며 말도 하지 못하는 식물들을 키우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다만, 네펜데스라는 식물이 벌레들을 잡아먹어준다는 이야기에 혹해 몇 번의 결제 고민 끝에 집으로 데려오게 됐다.


낼름이(네펜데스. 왼쪽)와 리모(레몬나무. 오른쪽)


데려오고 나니 요놈 참 매력 있다. 말도 못 하고, 성장이 더딘 것이 단점인 줄로만 알았는데. 오히려 그 탓에 하루에 열 번도 더 들여다보게 된다. 겉흙이 마르지는 않았는지, 습기는 적당한지, 어제와는 꽃 모양이 어떻게 다른지, 키가 조금이라도 컸는지 자꾸만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예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아직도 수마리의 날파리들이 식탁 주위를 날아다니며 호시탐탐 하는 것을 보면, 낼름이는 벌레를 잡아먹는 데는 아직 미숙한 듯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파리 끝에 자그맣게 자라고 있는 꽃 봉오리를 보면, 포낭충 덮개의 고운 색깔을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결국 아기 레몬나무까지 데려오고야 말았다. 아직은 레몬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자그맣고 탱글탱글한 엄지손톱만 한 열매를 달고 있을 뿐이지만, 우리 집에서 가장 좋은 목에 터를 내주었다. 제일 좋아하는 젤라또 맛인 레몬맛(리모네)의 명칭에 착안해서 리모라고 이름도 붙여줬다. 혹시나 뒤에 있는 이파리들은 햇빛을 못 볼까 해가 쨍한 날에는 한두 시간마다 손수 화분을 돌려주는 수동 태양광 시스템(?)을 발동했다. 지인들이 식물을 키우다가 죽이는 경우를 꽤나 많이 봐서 그런지 이런저런 정보도 많이 찾아보고, 어떻게 하면 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을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키울 수 있을지 자주 검색해보고 있다.



이렇게 매일 낼름이와 리모를 들여다보는 시간들을 지내다 보니, 속도가 느린 것들이 주는 따뜻한 지루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요즘처럼 시국이 좋지 않아 집에만 갇혀 지내는 나 같은 사람에게 꽤나 큰 위로를 주고 있다. 1년 내내 멈춰있는 기분이 들고 있는 요즘, 성장에 대해 마음만 앞서 조바심이 나는 성격 급한 사람들에게 반려식물 키우기는 그냥 식물을 키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듯싶다.


마치,
'느려도 괜찮아, 잠깐 멈춰도 괜찮고 크지 못해도 괜찮아,
그래도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어'
라고 말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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