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에 들이는 봉숭아 물처럼, 그렇게 '우리들'은 서로를 물들인다
그동안 꽤 많은 영화에서 아이들이 주인공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내고 그 문제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풀어가는 영화는 내 기억에는 그다지 많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영화의 흐름에는 예외 없이 어른들이 등장하고는 했다. 도움을 주는 인물이든, 괴롭히는 인물이든.
그만큼 아이들의 이야기로만 그득한 이 영화는 능숙하지(능글맞지?) 못하고 다소 어색하지만, 그만큼 빛나고 진실하다. 왕따나 이혼, 재혼, 거짓말 등 소름 끼치게 사실적이고 잔인한 현실 속에서, 선이 와 지아는 어렵사리 살아 숨 쉰다. 그 호흡이 너무나 힘들어 보이지만, 너는 너 나는 나가 아니라 마음이 통하는 '우리들'이기에 서로 싸우면서도 기대고, 미워했다가도 그리워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우리들> 속의 아이들은 온전히 자신들의 이야기로 영화를 꽉꽉 채운다. 어른들은 그저 '아이가 아닌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곳에 서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기는 하지만, 그들은 해결사도 아니고 악당도 아니고, 그냥 그곳에 서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아이들 사이에는 어떤 스릴러, 미스터리물보다도 섬세한 심리전이 벌어지고, 때로는 어른들보다도 현명한 해결책을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 툭 하고 내놓는다. 그런 영화를 보면서 꽤나 혼이 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유쾌했다. 이런 식의 혼남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하고 싶을 만큼.
거짓 없는 영화다. 장면 장면, 마디마디마다 정직하고 단조롭다. 허례허식 하나 없고, 사실이 아닌 장면이 하나 없다. 가끔 그런 솔직함은 날 선 가시가 되어 아프디 아픈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에 주체할 수 없이 아파, 나를 향했던 그 가시의 방향을 비틀어 상대방에게도 생채기를 내버린다. 이러한 상처에, 어른들은 술을 마시거나 서로 등을 돌린 채 영영 이별하고는 한다.
역시 이 영화가 '어른들의 영화'였다면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 채 참고 참는 것으로 이야기가 흘러갔을 것이다. 결국 상처는 트라우마가 되어 복수를 낳고 끝을 향해 내달렸을 것이다. 혹은 다른 행복한 사건의 발생으로 잊는 '척' 하거나, 가족, 우정, 사랑을 핑계 삼아 가슴속 깊이 묻어두는 것으로 엔딩 크레딧을 맞았을 것이다.
<우리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상처는 거의 어른들의 그것과도 같다는 걸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서로를 좋아했다가도, 질투하고, 험담을 하고, 아픈 부분을 건드리고,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은 또 들통난다. 아이들이라고 그 상처의 깊이가 얕지는 않다. 오히려 더 많이 아프고 견디기 힘들다. 아이들은 술을 마실 수도 없고, 반을 옮기거나 학교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오롯이 상처를 직면해야만 한다. 나를 아프게 한 그 아이들과 함께, 피구를 해야 하고 학원에 다녀야 하고 소풍을 가야 한다.
하지만 상처를 숨기고 복수의 칼날을 가는 우리들과는 다르게, 아이들은 상처에 대놓고 아파한다. 상처를 낸 상대의 집에 찾아가 왜 그랬냐고 묻는다. 미안한 마음이 들면 사과의 선물을 들고 찾아가고, 싫은 마음이 가득할 때는 대놓고 욕을 한다. 간절하게 친구가 되고 싶을 때는, 한 끝의 희망이라도 꼭 잡고 먼저 손을 내밀기도 한다.
아마도 나를 포함한 많은 어른들은, '대놓고 아파할 용기'조차도 없는 걸까. 아프면 아프다고 얘기하고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간단할 일을, 혼자 마음속으로 삭히다가 되지도 않는 추측을 하고, 결국 관계를 끝내버린다. 쉽게 포기한다. 함께했던 즐거운 시간과, 소위 '우정'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창피함'과 '당당하지 않은 자존심'에 집어삼켜진다.
영화는 상처받은 관계에서 끝나지 않는다. 과거에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소중했던 친구였기에, 죽도록 밉지만 못 이기는 척 그를 옹호한다. 서로를 쳐다보는 타이밍은 자꾸 어긋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결국 둘은 서로 마주 보고, 빙긋 웃을 것이다. 엔딩 크레딧 뒤에서.
영화를 통틀어 가장 통쾌한 해결사는, 엄마도 선생님도 그리고 주인공인 선이, 지아, 보라도 아니었다. 최고의 감초 윤이었다. 윤이는 선이의 어린 동생이다. 자꾸 친구 연우와 놀다가 맞고 돌아오는 탓에 엄마와 누나 선이는 걱정이 태산이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이는 그 누구보다도 해맑고, 관객들을 절로 미소 짓게 할 만큼 아름답다. 그런 윤이에게 선이는 묻는다.
너 바보야? 걔가 때렸으면 너도 더 때려줘야지.
그러자 윤이는 누나의 속도 모르고, 그게 뭐 어쩌라는 듯, 당연하게 답한다. 그렇지만, 이 한마디에 나는 완전히 넉다운됐다. 이런 게 깨달음이구나.
그러면 언제 놀아?
애초에 우리가 관계에서 자꾸만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건, 끝없는 상처의 '반복' 그 자체 때문이다. 별 거 아닌 상처들을 서로 끝없이 주고받으며 골은 깊어지고 아픔은 커진다. 특히, 관계의 상처는 자연 치유되지 않는다. 시간이 약이라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닌가 보다. 관계의 골이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고 무뎌지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는다. 한번 후- 불면, 다시 처음 다쳤을 때처럼 아픈 게 사람 사이의 상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냥 그 사람은 나에게 아픈 사람,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고, 그렇게 한 소중한 인연은 먼지 속에 묻혀버릴 것이다.
이 상처의 시작도 사실은 윤이와 연우처럼, 서로 좋다고 놀다가, 정말 어쩌다가 생긴 상처였을런지도 모른다. 너무 친하고 너무 좋아서 가까이하다 보니 생긴 그런 상처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해하고 미워하고 실망하며, 복수의 무한 회귀에 망설임 없이 몸을 싣는다. 그러다 보면, 애초에 왜 이 고통의 길을 걷고 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고 계속 아프기만 하다.
윤이 말처럼, 그러다 보면 도대체 언제 놀 수 있을까. 그만 싸우고, 그냥 내가 좀 아픈가 보다 하고, 다시 놀면 그만이다. 의외로 나의 입에서 '놀자'라는 한 마디가 나오기를, 나 스스로도 그 친구도 고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어려운 건 사실이다. 윤이보다 수십 년을 더 살면서, 삶에 덕지덕지 붙은 게 이만큼, 체면치레하며 신경 써야 할 게 또 이만큼이다. 그래도 우리는 마음속으로는 분명히,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싸우다가도 다시 놀 수 있는 그런 친구 한 명을 말이다. 그런 친구는, 안 싸워서는 안 생긴다. 싸우고 나서 시간이 흐르는 것만으로도 안 생긴다. 싸우고, 놀자고 하면, 그때 생긴다. 노력해야 한다.
지아가 전학 오고, 따돌림당하던 선이의 친구로 지낸 방학 동안, 둘은 그 누구보다도 절친한 친구였다. 팔찌를 나눠 끼고 봉숭아 물을 같이 들였다. 손톱에 발갛게 물든 봉숭아 물은 영화에서 의미가 크다. 세련되고 똑똑하지만 선이를 따돌리는 주도자 보라가 매니큐어를 바르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조금은 투박하다. 물들이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고 랩에 싸인 손톱은 거슬리고 불편하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손톱에 입혀진 예쁜 붉은색을 만날 때만큼 두근거리는 경험은 많지 않다. 그렇게 어렵게 물들인 봉숭아 물은 오랜 기간 손톱에 남아 끝까지 색을 발한다. 마치 지아와 선이의 관계, 혹은 우리들의 관계처럼. 그 위에 보라의 하늘색 매니큐어가 발린 적도 있다. 하지만 매니큐어가 사라진 자리에도 봉숭아 물은 계속 그렇게 발갛게 남아있다. 손톱이 다 자라 겨우 손끝 가장자리에 간신히 붉은빛이 남아있는 걸 본 선이는, 용기를 내서 지아를 감싼다. 둘은 나란히 선다. 같이 처음 길을 걸어갔을 때처럼 말이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자, 나는 다음 해 여름에도 두 친구의 손톱이 봉숭아 물로 다시 붉게 빛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더 이상은 아무도 아프지 말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