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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또 Nov 24. 2016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을 보고 적는 감상적인 후기 

*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그런 적 있지 않을까? 


어릴 적부터 쌓아왔던 책과 노트들을 정리하면서,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차 더 이상 뭔가를 구겨 넣을 공간 조차 없는 서랍을 정리하면서, 

쌓인 영화 포스터나 각종 입장권들을 정리하면서, 

더 이상은 입지 않거나 입지 못하는 옷들을 정리하면서, 


더 이상 '필요 없어져버린' 것들을 버릴지 말지 망설였던 순간을 우리는 겪어본 적이 있다. 내 곁에 잠깐이라도 머무른 모든 것들은, 우리의 추억을 저당 잡고 버려지기를 거부한다. 사용 가치 없는 이 물건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들조차도 상당한 낭비지만, 왠지 쉽게 버릴 수가 없다. 


영화를 너무나 보고싶게 만들었던 포스터. 


관계를 분실하다


인간처럼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기억력조차 그리 좋지 못한 우리들은 언제나 시간을 다양한 물건들에 새겨둔다.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고,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사용하고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 기꺼이 기억을 나누어준다. 그래서인지 언뜻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조차 버리기가 쉽지 않다. 시간을 나누어줬던 무언가가 사라지면, 우리의 추억과 그것에 연관된 기억들 역시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아는 모양이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은 이런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삶의 마지막 날, '나'는 악마와 거래를 한다. 수명 하루를 연장해주는 대신 소중한 것 하나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계약이다. '나', 그리고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던 나조차도 이 계약 내용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얻는 것은 하루의 삶이지 않는가. 삶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고작, 내가 먹고 자고 하루를 살아가는데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없애는 대신 하루를 더 살 수 있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딱히 없다. 

'나'와 '첫사랑 그녀'. 왠지 모르겠지만 이 둘의 이름은 영화에서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전화기를 없애자, 잘못 걸려온 전화로 인해 시작된 첫사랑과의 모든 추억이 사라진다. 영화를 없애자, 영화를 좋아하고 공유하며 친구가 됐던 타츠야와의 인연이 사라지고, 시계를 없애자 아버지가 오랜 시간 꾸려오던 시계 가게가 사라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양이를 없애려는 그때, '나'는 깨닫는다. 세상은 소중한 것들로 가득 차 있고, 별 볼 일 없어 보였던 '나'는 생각보다 멋지고 충만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영화는 무언가가 사라짐으로 인해 유발되는 문제점이 '불편함'이 아닌 '관계의 분실'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처음 전화기를 없앤다고 했을 때, 분명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불편하겠지', '고립감이 느껴지겠지', '심심하겠지' 등등, 전화기의 효용에 대해 떠올린다. 1분이라도 휴대폰이 없으면 불안에 떠는 우리의 자신의 모습을 안 그래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너무 귀여워서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무언가가 사라지면서 생기는 불편함은, 사라진 관계에서의 고통에는 조금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느꼈다. 인간은 참 의존적이다. 우리는 다양한 '무언가'들에 소중한 추억들을 맡기고, 그 '추억'들에는 나 자신을 내맡기고 살아가고 있다. 


나를 그리고 세상을 이루는 것은 '관계' 


그렇게 추억과 인연을 하나하나 잃어가면서 결국 '나'는 깨닫는다. 나의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것들이지만, 전화기와 영화와 시계와 고양이가 사라짐으로써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은 생물적으로는 다양한 장기들과 영양분들로 구성되었지만, 사람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뛰는 심장 외에도 '타인과의 관계', '추억'과 같은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세상을 구성한다. 나와 전화기의 관계, 전화기와 그녀의 관계는 나와 그녀를 잇고, 그 사이에 영화가 또 하나의 관계로 등장하며 그 영화는 또한 타츠야와의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살고싶다고 외치던 첫사랑과 아르헨티나 이과수 폭포 앞에서


그리고 이 모든 관계에서 단 하나만 사라져도, 세상은 변한다.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곧 세상에서 사라질 '나'는 말하지는 않았어도 잊힐 것을 두려워했다. 여행 중에 만났던 톰도, 첫사랑이었던 그녀도 그랬다. 그들은 걱정한다. 내가 없는 세상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은 아닐까, 내가 죽어도 누군가가 울어줄까. 그래서 살고 싶다고 외치고 외친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들에게 확실히 답해주지 못했다. '네가 죽으면 세상은 반드시 변할 거고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널 위해 울어줄 거야'라고.


고양이를 없애기 직전 '나'는 결국 깨닫는다. 세상에서 전화기가 사라져도, 영화가 사라져도, 시계가 사라져도, 고양이가 사라져도 이렇게 많은 변화가 생기고 아픔이 생기는데,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분명 세상은 조금은 달라져있을 거라는 사실을. 이런 메시지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편지를 통해 한 번 더 '나'에게 전달된다. 아들이 얼마나 멋지고 특별한 사람인지, 얼마나 세상에서 소중한 존재인지, 얼마나 주위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어머니의 편지는, 자기 자신의 존재에 불안감을 느끼는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답을 주었다. 

언제나 대체 가능한 우편배달부라는 일을 하는 '나'이고,

마지막으로 전화할 기회가 있어도 수많은 전화번호부 목록에서 전화할 사람 찾기조차 힘든 '나'이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지만,  

그는 얇지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들을 통해 자신의 삶과 죽음이 세상에 변화를 일으킬만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수많은 관계들이 얽히고설킨 세상 속에서, 우리 하나하나는 세상에서 분명 그다지 크지 않은 존재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연결된 그 작은 관계들 역시 나의 일부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작지 않은 존재다.


관련하여 추천하는 영화


왠지 일본 문학, 영화는 '죽음'을 이야기의 소재로 서슴없이 활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럼에도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는 것이 특징인 듯싶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을 포함하여 몇몇 영화들은 죽음을 오히려 삶에 대한 감사함, 작은 것들의 소중함, 가족에 대한 사랑과 같은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만약 관심이 있다면, 보기를 추천하는 영화가 두 개 있다. 2010년에 나온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컬러풀>과,  1998년에 개봉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이다.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고,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던 이들이라면 이 두 영화를 통해서 역시 또 다른 좋은 메시지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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