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호칭에 가려진 나의 이름
아이가 좀 더 자라 어린이집에 가게 되었을 때였다. 하원 후 놀이터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같은 반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고, 그만큼 아이 엄마들과도 조금씩 가까워졌다. 처음엔 인사만 나누던 사이였지만, 몇 번 얼굴을 보다 보니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게 되었고, 그때 이런 대화를 나눴다.
나: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이 친구 엄마: 아 그냥 '율곡맘'으로 저장해 주세요.
나: (엇?)
순간, 대답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아, 이름 말고? 그저 '율곡맘'?
물론 알아보기 쉽게 율곡 엄마니까 '율곡맘'이라고 표시하는 건 나도 이해한다. 나도 그렇게 저장하긴 했다. 하지만 성함을 물어본 것은 그 분의 이름을 앞에 쓰고 율곡맘은 괄호 안에 넣어두고 싶었다. 나는 엄마들의 이름이 궁금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통성명은 생략되고 아이 이름을 중심으로 정체성이 재편된다.
그런 순간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나 스스로도 이름을 잊어버리게 된다. 어릴 때부터 써온, 나라는 사람의 이름이 아닌, 누구의 엄마로만 불리는 일이 일상이 된다. 이름이 불리지 않으니, 정체성도 조금씩 흐려진다.
아이가 배에 있을 때에 비하면 '엄마'의 정체성은 많이 강화된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혼자였던 나'라는 정체성을 손에 쥐고 있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이 두 정체성이 나란히 공존하기보다는 서로를 밀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했다는 데 있었다.
그 때 나는 착각했던 것 같다. '엄마'라는 새로운 자아가 등장하면, 기존의 자아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마치 저장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 새로운 파일을 넣기 위해 오래된 파일을 지워야만 하는 것처럼. 그래서 더 애써 붙잡았던 것 같다.
엄마이기 이전의 독립적인 자아, 사회 안에서 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던 내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그런 날이 이어지다보면 문득 서글픔이 밀려온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나는 누구였지?
니체의 『왜 너는 편하게 살고자 하는가』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우리는 사물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정의하고, 그 정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사물의 본질로 인식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현실을 '창조'하며, 사물에 대한 우리의 최초 이해는 곧 그 사물의 '진실'이 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이름을 통해 존재를 규정하고, 그 정의가 곧 현실이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지금 '엄마'라는 새로운 현실 안에 들어와있다. 아직은 조금 낯설고, 어딘가 어색하지만 점차 나아질 것이다. 이름이 바뀌었다고 내가 사라진 건 아니다. 그저 역할이 하나 더 늘었을 분이다.
이름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것,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나를 잘 지켜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