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동으로 써내려간 문장

by 늘람

창밖에서 들어온 햇빛이 종이 위에 닿는다.

먼지 입자가 희미하게 흔들린다.

나는 한참을 그 미세한 움직임을 바라본다.

다시 펜을 든다.


그날 처음으로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올렸다.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더는 미룰 수 없었던 파동 같은 감정이 나를 움직였다.

아직 말로도 옮겨지지 않은 감정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그 진동이 어느 순간 언어의 형식을 빌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형식 위에 흔들리는 문장을 얹어 나갔다.


처음엔 폭발하듯 쏟아냈다.

하루에 두 편, 때로는 세 편.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글쓰기라기보단 방출에 가까웠다.


오랜 시간 눌러두었던 말들,

의식 어딘가에 쌓여 있었던 잊힌 조각들이

마치 감정의 압력에 의해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말은 문장이 되었고, 문장은 파동이 되었다.


어느 문장은 나를 울렸다.

어떤 문장은 읽으며 나를 다독였다.

하나의 단어가 던진 진동이 문장 전체를 이끌어갔고,

나는 그 파동의 끝에서 겨우 나 자신을 마주했다.


4주가 지났다.

글을 쓰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하루 한 편을 쓰지만, 쉬운일은 아니었다.


처음의 속도는 사라졌지만, 방향이 생겼다.

속도는 감정의 분출이었고, 방향은 나의 사유가 붙잡은 축이었다.

나는 그 방향 위에 나를 눕히고, 차분히 나를 읽어가기 시작했다.


글을 쓴다는 건,

스스로를 해석하는 일이다.

단지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 한 문장을 다시 읽으며

내 안의 흐름을 따라가는 작업이었다.


문장을 다듬는 손끝에서 떠올랐다.

하고 싶은 말과 하지 못한 말,

애써 외면했던 말까지 동시에.


그때 깨달았다.

언어는 단순히 생각을 담는 그릇이 아니다.

생각 그 자체를 만들어내는 도구다.

우리는 말하면서 생각하고, 쓰면서 존재한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언어는 존재의 집'이었고,

나는 그 집을 짓는 동시에 그 안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나를 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졌다.

그 눈이 닿는 시야 역시 바뀌었다.


걱정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불안은 여전히 마음 어딘가에서 고요히 웅크리고 있다.

어떤 생각은 여전히 끝까지 써 내려갈 용기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감정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제는 그것을 떨쳐내려 하기보다,

그 곁에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불안을 제거할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또 그 걱정의 실체가 나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는 니체의 말.


나는 불안과 싸우려 했지만,

정작 불안의 근원은

불안과 싸우려는 나 자신이었다.

받아들임이라는 것은 체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화해하는 용기였다.


표정이 변했다고들 한다.

사람들은 내가 밝아졌다고 했고,

나도 어렴풋이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언어로 자신을 정돈해가는 사람은

자신이 자신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타인에게도 전해지는 것이 아닐까.


글을 쓰는 동안 잊었던 기억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신기했다.


책을 쓰고 싶었던 어린 날의 꿈,

죽을 때 책에 깔려 죽고 싶다고 말하던 유치한 바람,

물리학으로 삶을 말하고 싶다는 막연한 열망.

그 모든 것이 지금 내 문장 속에서 조용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기억은 늘 현재로 돌아온다.

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던 감각들이 문장의 구조 안에서 다시 떠오르고,

나는 그 떠오름을 받아 적기만 하면 되었다.


그 기억은 단지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나를 다시 앞으로 밀어주는 힘이다.


지금은 여전히 내 안의 것을 쏟아내는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문장이 누군가에게 들려질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나에게 했던 말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필요한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조용하고 아름다운 파동일까.


글을 쓴다는 건 그런 일이다.

어떤 떨림은 문장이 되어, 또 다른 진동을 만든다.


나는 오늘도 그 진동을 따라 종이 위에 조용히 말을 얹는다.

그 말이 나를 살게 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나를 이끌 것임을 알기에.


햇빛이 종이 위에 닿는다.

먼지가 떠오르고, 그 위로 문장이 흐른다.

나는 그 흐름 속에 잠긴다.

그리고 다시 한 줄, 아주 조심스럽게 쓴다.


내 안의 파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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