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선택의 늪

by 늘람

고3이 되면 공기가 변한다.

교실로 들어서는 아이들의 발걸음과 책상 위 손의 움직임,

복도에 스치는 낮은 말소리까지 어딘가 달라진다.


3월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교실 앞 게시판엔 수시와 정시,

학종과 논술이라는 단어들이 빽빽하게 붙는다.


선생님들은 진로 상담을 시작하고,

아이들은 자신이 어디에 설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마주하는 질문은 단순하다.

정시냐, 수시냐. 이 선택 앞에서 아이들은 꽤 쉽게 대답을 내놓는다.

“저는 정시요.”

“저는 수시요.”

속이 비어 있는 공허한 대답이다.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물으면 답은 대체로 비슷하다. 정시는 1년 동안 열심히 하면 돼서요,

수시는 내신이 조금 되니까요.

단순한 문장 뒤에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 막연함을 가르는 일은 쉽지 않다.

선택의 순간부터 관성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정시를 선택한 아이들은 ‘난 이제부터 공부만 하면 된다’는 결심을 다진다.

하지만 결심의 에너지는 처음이 가장 크고,

이후에는 급격히 감소한다는 사실은 보편적인 진리이다.


초기에 주어지는 충격량이 크다고 해서 그 움직임이 지속되리란 보장은 없다.

오히려 더 큰 마찰과 저항이 작용한다.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1년의 시간 안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마찰이 생긴다.

친구들의 소식, 학교 행사, 가정의 기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품었던 결심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자꾸만 몸을 잡아끈다.


그러니 처음에 “정시로 가야지”라고 마음먹은 아이들 중

실제로 1년 내내 자신을 밀어붙이며 성적을 올리는 경우는 극소수다.


문제는 이 극소수라는 단어에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을 그 극소수 안에 넣는다.

나는 다를 거야, 이번만큼은.

하지만 세상은 그런 기대를 예외로 받아주지 않는다.


확률이라는 냉정한 벽.

어떤 상태가 존재할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이 실재로 나타날 가능성은 언제나 통계를 따른다.


측정의 순간은 냉혹하다.

입시라는 측정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이들은 마치 측정 이전의 모든 가능성이 현실화될 것처럼 믿는다.


수시를 선택하는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신 성적과 비교과 활동이 준비되어 있는지에 대한 냉철한 성찰보다는,

이 학교 한번 써볼까, 여기도 넣어볼까 하는 마음이 더 크다.


특히 정시를 준비한다는 아이들까지도 수시에는 손을 뻗는다.

문제는 그 손이 닿는 곳이 현실적인 선택지가 아니라는 데 있다.

불가능에 가까운 학교에 지원서를 넣는 모습은 일종의 요행 심리의 발현이다.

도박이나 로또와 다르지 않다.


그런 모습들을 지켜볼 때면 스피노자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모든 존재가 자기 보존과 향상을 향한 의지, 코나투스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 의지는 순수하게 흐르지 않는다.

교육과 사회 구조, 입시라는 시스템이 그것을 자주 왜곡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제대로 바라보는 대신,

허상 속에서 그것을 소비해버린다.

코나투스는 원래 강렬한 삶의 힘인데,

어느 순간부터 ‘가능성이 없어도 지원해볼래요’라는 말로 바뀌는 걸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입시의 과정에서 또 한 번 큰 선택의 순간은 정시 결과가 나온 후 찾아온다.

처음 정시를 외쳤던 아이들은 생각보다 낮은 점수에 당황한다.

수시로 갈 수 있었던 대학보다 못한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면 재수를 말한다.

다시 1년, 다시 한 번 제대로 해보겠다는 결심.

그러나 다시 관성과 마찰이 기다리고 있다.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이번에도 자신이 극소수 안에 들어갈 거라는 믿음,

측정 이전의 가능성에 대한 착각,

그리고 자기 존재를 둘러싼 현실의 조건을 망각한 채 요행을 기대하는 반복.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 망각이다.

그는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세계 속에 놓여 있는지를 잊고 살아간다고 했다.


입시 과정에서 학생들은 종종 자신이 가진 한계와 가능성,

현재 위치와 그동안 쌓아온 것들을 잊어버린다.

‘나는 잘할 거야’라는 막연한 믿음만 남는다.

그 믿음이 결국은 자기 존재의 구체성을 망각한 채,

추상적인 성공이라는 허상만 좇는 태도로 굳어진다.


더 안타까운 것은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부모와 교사, 학교 시스템 모두가 이 구조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학교 상담 시간에 보면 학생에게 진지하게 자기 이해를 묻는 질문은 드물다.

‘어디를 쓰고 싶은데?’, ‘이번 모의고사 점수는 어땠어?’, ‘그래서 정시야, 수시야?’라는 질문들이 반복된다.


하지만 ‘너는 어떤 때 가장 몰입하니?’, ‘너 자신에 대해 어떤 강점과 약점을 알고 있니?’ 같은 질문은 좀처럼 듣기 힘들다.

학생들은 자기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방향을 잡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가능성을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가능태는 잠재적인 상태이고, 현실태는 그것이 실현된 상태다.


많은 학생들이 가능태에만 머문다.

나는 잘할 수 있어, 나는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그 가능성이 현실태로 옮겨가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노력과 시간,

과정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다.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전환하기 위한 길목에서 멈춘다.

마치 어떤 에너지가 충분한 전이를 이루지 못하고 중간 상태에서 소멸해버리는 것처럼.


입시를 마친 후 재수를 선택할 때에도 같은 모습이 반복된다.

다시 1년만 하면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1년이라는 시간 동안 필요한 것은,

단순한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임을 모른다.


그 변화는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어떤 초기 조건을 지니고 있으며,

그 조건에서 어떤 변화가 가능하고 어떤 한계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작은 초기 조건의 차이가 커다란 결과의 차이를 만든다는 말을 우리는 여러 현상 속에서 확인해왔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초기 조건을 직시하기보다 원하는 결과만 바라본다.


그 결과, 같은 선택과 같은 실패가 반복된다.

문제는 그 반복 속에서 자존감이 점점 깎여나간다는 점이다.

처음엔 ‘이번엔 잘할 거야’라는 자신감으로 시작했지만,

반복되는 실패는 결국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라는 자기 부정으로 이어진다.


교육은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가능태와 현실태를 정확히 인식하게 돕는 질문과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

입시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도 자기 존재의 구체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다.


아이들은 아직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문제는 그 가능성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다.

그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다.

교육이 그 이해의 거울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아이들은 끝없이 반복되는 착각과 요행 속에서 방향을 잃는다.


입시의 끝에서 다시 시작을 이야기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바란다.

교육은 ‘정시냐, 수시냐’를 묻기 전에 ‘너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니?’를 먼저 물을 수 있기를.

그리고 아이들이 존재의 망각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가능성을 현실로 옮겨가는 힘을 기르도록 도울 수 있기를.


그 길이 결코 빠르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통해 아이들은 진정한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지금 나는 지쳐 있는 고3 학생들에게 ‘열심히 해, 잘 될 거야!’라는 말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래서 난 늘 안타깝고,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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