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차원의 한계를 넘어, 무차원을 사유하다

by 늘람

물리학과 수학이 오래도록 공유해 온 신념이 있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뉴턴의 운동 법칙은 세 줄로 행성의 궤도를 설명했고, 맥스웰 방정식은 네 개의 식으로 전자기 현상을 통일했으며, 아인슈타인의 E=mc²는 질량과 에너지의 동일성을 직관적으로 드러냈다. 우리는 복잡한 세계를 단순한 언어로 포착할 때, 자연의 본질에 가까워진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단순함에서 멀어져 가는 듯하다. 양자역학의 미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차원을 필요로 한다. 칼루자–클라인 이론은 전자기력과 중력을 통합하기 위해 5차원을 상정했고, 초끈이론은 모든 기본 입자를 하나의 진동하는 끈으로 설명하기 위해 10차원이나 11차원을 요구한다.


이 이론들의 동기는 분명 단순함의 추구였다. 고차원에서는 하나의 기하학적 구조로 설명되는 것이 우리 차원에서는 여러 개의 서로 다른 힘으로 나타난다. 마치 복잡한 그림자가 실제로는 단순한 3차원 물체에서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론은 더욱 복잡해지고 직관과는 멀어져 갔다.


정의된 차원의 한계

이 모든 이론이 전제하는 것은 동일하다. 우주는 어떤 수의 차원을 가진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가정이다. 5차원이든, 11차원이든, 심지어 26차원이든 말이다.


그런데 차원의 수를 늘린다고 해서 근본적인 질문이 사라지는가? 왜 하필 11차원인가? 12차원이나 13차원이면 안 되는가? 우리는 마치 복잡한 지도를 펼쳐 놓고 길을 찾는 사람 같다. 한 장으로 부족하면 다른 지도를 겹치고, 또 다른 지도를 덧대지만, 겹쳐진 지도가 많아질수록 실제 길은 점점 더 보이지 않는다.


칸트는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현상계일 뿐,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에게 공간과 시간은 사물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선험적 직관 형식이었다. 즉,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 자체가 이미 공간-시간이라는 틀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원'이라는 개념도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 방식일 수 있다. 우리가 덧붙이는 차원들은 자연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사고방식의 한계를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생각해 보자. 우리는 왜 공간을 '차원'으로 기술해야 한다고 믿는가? 그것이 과연 필연적인가, 아니면 그저 우리가 익숙한 수학적 언어일 뿐인가?


카오스, 차원을 초월하는 존재

흥미롭게도 현대 과학은 이미 차원의 경계를 흐리는 현상들을 발견했다. 바로 카오스와 프랙탈이다.

로렌츠 어트랙터를 생각해 보자. 이 기묘한 구조는 2.06차원을 가진다고 한다. 2차원도 3차원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는 존재다. 헤논 맵은 1.26차원, 코흐 눈송이는 1.26차원을 가진다. 이들은 우리의 정수 차원 체계로는 포착할 수 없는 비정수 차원의 실재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의 예측 불가능성이다. 카오스 시스템에서는 초기 조건의 아주 작은 차이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는다. 나비효과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사실상 정확한 측정이라는 개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무한히 정밀한 측정이 가능하다고 해도, 카오스는 여전히 예측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카오스는 과연 몇 차원인가? 정의된 차원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이 기묘한 존재들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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