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랜 시간 동안 물리학을 사랑해 왔다. 물리학은 세계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는 언어라고 믿어왔고, 그 믿음을 놓아본 적이 없다. 뉴턴의 세 줄짜리 운동 법칙이 행성들의 춤을 명쾌하게 설명할 때, 맥스웰의 네 개의 방정식이 우주의 빛과 전기를 하나로 연결할 때, 아인슈타인의 E=mc²이 질량과 에너지를 같은 것으로 밝힐 때마다, 나는 물리학의 간결함과 아름다움 앞에서 깊은 경외를 느꼈다.
그러나 물리학 논문에서 정교한 측정 결과들을 읽을 때마다, 또는 측정이라는 행위 자체를 생각할 때마다 문득 서늘한 불안감이 들곤 한다. 그 숫자들이 완벽히 인간적인 언어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빛의 파장 측정에 관한 논문을 읽던 중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정말 빛을 '측정'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빛이 물질과 만나 만들어내는 현상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사용하는 초(second), 미터(meter), 킬로그램(kilogram)은 지구 위에서의 약속일뿐, 결코 우주의 보편적인 기준이 아니다.
이 불안은 측정의 역사를 돌아볼 때 더욱 깊어진다. 1960년까지 미터의 기준은 파리에 보관된 백금-이리듐 막대였다. 하지만 그 막대조차 온도와 습도에 따라 미세하게 변했고, 결국 우리는 빛의 속도라는 '불변의 상수'로 도피해야 했다. 1967년 이전까지 1초는 지구 자전을 기준으로 정의되었지만, 지구의 자전이 점점 느려진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우리는 세슘 원자의 진동으로 피난처를 옮겼다.
하지만 이런 '개선'들이 과연 절대적 기준에 가까워지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더 정교한 인간적 약속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이런 의문 앞에서 철학자 칸트의 통찰이 새롭게 다가온다. 스마트폰 번역 앱을 생각해 보자. 앱은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해 주지만, 번역된 영어가 원래 한국어와 정확히 같은 뜻일 수는 없다. 번역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무언가가 사라지고, 무언가가 덧붙여진다.
칸트가 말한 인식 과정도 이와 같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으며, 항상 인간의 선험적 직관 형식 - 즉 공간과 시간이라는 틀 - 을 통해서만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측정이야말로 이런 번역 과정의 가장 정교한 형태가 아닐까.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기관과 인식 체계를 통과시켜 번역하고 있다. 빛의 속도조차 우리가 정한 시간 단위와 거리 단위의 결합일 뿐이다. 세계는 초나 미터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인간만이 아는 언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런 인간 중심적 태도를 더욱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우리가 세계를 도구처럼 다룬다고 지적했다. 망치를 들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이듯, 측정 도구를 들면 모든 것이 숫자로 보인다.
온도를 예로 들어보자. 따뜻한 봄날의 햇살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온도계 없이도 그 따뜻함을 온몸으로 안다. 하지만 온도계는 그 생생한 따뜻함을 26.5℃라는 추상적 숫자로 바꿔버린다. 숫자는 정확하지만, 그 따뜻함을 느끼는 살아있는 경험은 사라진다.
니체는 일찍이 이런 인간 중심성을 간파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으로 두고,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세계를 해석한다. '객관적 측정'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 중심적 해석의 정교한 형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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