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과 차원의 경계

기억과 존재에 대한 사유

by 늘람

오랜 시간 동안 가졌던 질문이 있다. 기억이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인식의 지층: 차원과 층위의 관계

우리가 존재하는 차원을 n차원이라 할 때, 우리가 완벽히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n-1차원이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하지만 이제 나는 사실상 쌓여가는 인식의 층이 차원이 아닐까 하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실제로 우리는 3차원의 공간을 살지만, 그 삶을 기록할 때는 2차원의 수단에 의존한다. 사진, 글, 그림 같은 평면적 기록은 실제 존재의 입체성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조각가가 3차원 작품을 만들더라도 그것을 인식하는 우리의 시선은 한 번에 하나의 각도, 즉 2차원적 투영만을 포착할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한계일까?


오히려 이는 인식이 층위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 있다. 우리가 3차원 공간을 '안다'는 것은 수많은 2차원적 경험들이 쌓여 형성된 인식의 층위이다. 마치 지질학적 지층처럼, 각각의 새로운 경험과 이해가 새로운 차원의 층을 만들어낸다. 임마누엘 칸트가 말한 선험적 형식조차도 이런 인식 층위의 누적된 결과일 수 있다.


선험적 형식: 칸트가 제시한 개념으로, 경험 이전에 우리 인식에 이미 갖춰져 있는 시간과 공간의 틀


정보의 역설: 홀로그램과 엔트로피의 춤

홀로그램의 제작과정은 다음과 같다. 1. 레이저 광선을 빔 스플리터로 나누어 하나는 대상에, 다른 하나는 감광판에 직접 조사한다. 2. 두 광선이 만나 만든 간섭무늬를 사진건판에 기록한다. 3. 현상된 건판 위의 흐릿한 줄무늬는 마치 아무 의미 없는 정보의 집합 같지만,

다시 같은 파장의 레이저를 비추면 공중에 떠오른 입체상을 볼 수 있다.


정보는 더 높은 차원의 현상을 낮은 차원에 부호처럼 새겨 놓은 흔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과정에서 알 수 있다. 홀로그램에서 3차원 물체의 모든 정보는 2차원 평면의 간섭무늬로 압축되어 저장된다. 하지만 이 압축은 단순한 손실이 아니라, 특별한 방식의 변환인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엔트로피의 역설이 나타난다. 클로드 섀넌의 정보이론에 따르면, 무작위성이 높을수록 정보 엔트로피가 크다. 홀로그램의 간섭무늬는 겉보기에 완전히 무작위적이며 최대 엔트로피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적절한 조건 - 올바른 파장의 레이저 - 이 주어지면 이 무작위성에서 완벽한 질서가 창발한다.


정보이론: 클로드 섀넌이 1948년 개발한 이론으로, 정보의 양을 수학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을 제시


이는 일반적인 압축 알고리즘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홀로그램의 압축은 전체 정보를 부분에 분산시키는 방식이다. 홀로그램을 조각으로 나누어도 각 조각에서 전체 상이 재현된다. 다만 해상도가 떨어질 뿐이다. 이는 마치 엔트로피가 높은 무질서 속에 모든 질서가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작위성과 의미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것이다.


의식의 열역학: 질서와 무질서의 변증법

홀로그램의 이 역설을 의식의 작동 방식에 적용해 보자. 인식 층위가 쌓이는 과정을 열역학적 관점에서 보면, 놀라운 패턴이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열역학 제2법칙은 고립된 계의 엔트로피가 시간이 흐르며 증가한다고 말한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조직에서 분해로 향하는 것이 자연의 기본 방향이다. 하지만 의식의 영역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인식의 폭이 넓어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층위에 동시에 접근할 수 있게 되고, 겉보기에 무관해 보이는 경험들 사이에서 새로운 연결과 패턴을 발견한다.


열역학 제2법칙: 에너지는 고온에서 저온으로만 자발적으로 이동하며, 고립된 계의 엔트로피(무질서도)는 항상 증가한다는 법칙


이 글에서 나는 이를 비유적 의미에서 '의식의 열역학'이라고 표현하려고 한다. 물리적 세계에서는 에너지가 분산되고 정보가 손실되지만, 의식의 세계에서는 경험이 축적되고 의미가 증폭된다. 현상학적 관점에서 보면,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으로의 이행은 마치 엔트로피 감소 과정과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물리 법칙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의식은 고립된 계가 아니다. 끊임없이 외부와 정보를 교환하며, 감각 경험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일리야 프리고진이 밝힌 '산일구조(dissipative structure)' 이론에 따르면, 평형에서 멀어진 열린계에서는 무질서 속에서도 자발적으로 질서가 창발할 수 있다. 의식도 이러한 열린 계의 특성을 보인다고 볼 수 있다.


산일구조: 프리고진이 제시한 개념으로, 평형에서 멀어진 열린계에서 에너지를 소산 시키면서도 질서를 유지하는 구조


앙리 베르그송이 『창조적 진화』에서 통찰한 것처럼, 물질의 하향적 운동(엔트로피 증가)과 생명의 상향적 운동(복잡성 증가) 사이에는 근본적인 긴장이 있다. 의식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이 두 힘이 만나는 지점에서 작동한다. 우리는 물리적으로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따르지만, 현상학적 차원에서는 정보의 조직화와 의미의 창발을 통해 마치 국소적으로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것과 같은 효과를 경험한다.


기억의 시간성: 저장에서 접근으로

홀로그램의 예를 통해 기억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이제 그 비유는 더 깊은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뇌과학자 칼 프리브람은 뇌의 기억 저장이 홀로그래픽 방식과 유사하다는 가설을 제시한 바 있다. 뇌 속 뉴런들의 활동은 매우 복잡한 다차원적 패턴이지만,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기억은 언제나 축약되고 단순화된 형태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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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결'과 '시간의 흐름'을 따라, 조용히 스며드는 이야기를 씁니다. 늘 머무르며 흐르는 글로 만나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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